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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다시 만날 세계를 향하여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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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0년에 태어났다. 그 해는 역대 최악의 성비를 기록한 해였다. 지금보다 남아선호 풍조가 강했고, 초음파 기기가 도입되면서 태아 성감별과 그에 따른 낙태가 성행했던 시기, 유독 1990년의 성비가 불균형했던 것은 백말띠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해 영남 지역의 여아 기피는 더 심해 1990년 경북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성비는 남아 130.7명 대 여아 100명에 달했다. 나는 딸이 많은 TK 집안에서 태어난 백말띠 여자아이였지만, 다행히도 지워지지 않고 세상에 왔다.

어려서부터 “백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 말들은 드셀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태어날 수 없었던 수많은 존재를 떠올렸다. 때로 울컥 분노가 치밀어오를 땐 ‘역시 내가 백말띠라서 드센가?’ 자책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내가 살아남은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 너무 자주 행해졌던 여아 낙태 속에서도 세상에 왔고, 여전히 젊은 여성에게 더 가혹한 사회를 마주하면서도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6년 5월 17일 강남역의 한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여성혐오 살인사건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

9년 전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불특정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피의자의 말을 들으며 느낀 것은 나 역시 그날 그곳에서 살해당할 수 있었다는 섬뜩한 감각이다. 그러나 여성을 향한 범죄는 여성의 존재를 지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 후 수많은 여성이 용기 내어 말하기 시작했고, 여성주의의 언어를 공부했으며, 서로의 상처를 껴안고 연대의 이름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 물결은 정치적 국면에서도 드러났다. 지난겨울, 때아닌 비상계엄으로 정국이 요동치던 때, 광장의 중심에는 내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김민아 연구원은 특히 젊은 여성들이 광장에 활발히 참여한 이유를 “잃을 것이 없는 현실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여성을 향한 편견과 조롱, 차별과 폭력은 여전히 우리 일상에 깊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으로 생명을 잃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고, 가정과 사회·정치에서도 여성의 자리는 여전히 취약한데, 여성의 고통은 오히려 점점 더 ‘불편한 이야기’로 밀려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페미’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공격받으며, 온라인상에서 혐오와 현실에서의 위협 사이를 넘나들며 버텨야 했다.

지난 광장에서 가장 자주 불렸던 노래 ‘다시 만난 세계’는 이러한 현실을 뛰어넘어 차별과 배제 없는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열망이자 결기였다. 하지만 대선이 다가오며 이들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혼탁한 선거판 속에서 여성과 청년·성소수자·장애인 등 수많은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정치적 수사 속에 사라져갔다. 그러나 여성을 향한 혐오 범죄가 여성들의 존재를 지울 수 없었듯이 소수자의 존재가 부정되지 않고, 누구도 지워지지 않는 세계를 향한 열망 역시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성별이나 나이, 능력이나 정체성이 누군가를 향한 혐오나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는 세상, 오히려 각자가 받은 고유한 은총을 자유롭게 피워낼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광장의 열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도 깊이 닿아 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되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그 누구의 목소리도 지울 수 없으며, 지워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살아남은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증언하며 만들어갈 ‘다시 만난 세계’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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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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