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홍릉 능역을 둘러보고 있는 선교사들’, 유리건판, 1911년 2월 25일 청량리 홍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09년 남자 수도회 최초로 한국 교회 진출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연합회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요청으로 한국의 사범학교와 실업학교 운영을 위해 1909년 남자 수도회 최초로 한국 교회에 진출했다. 당시 한국은 일제에 완전히 침탈됐고, 이듬해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었다.
정교 분리를 앞세워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온 한국 교회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의거로 더 이상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없게 됐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여러 법령을 통해 한국인들과 교회를 옥죄었고, 성 베네딕도회가 운영하려던 사범학교의 허가도 내주지 않았다.
제국주의의 거친 바다에 한 척의 작은 조각배 같았던 한국의 사정이 염려스러웠던 상트 오틸리엔연합회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서울 백동(지금의 혜화동)에 지은 수도원 축복을 위해 1911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더 이상 먼발치에서 한국의 문화 세계를 관망하는 소심한 관찰자가 아니라 지금 한반도 곳곳을 탐사하며 우리 민족의 문화와 풍속 그리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했다.
“인구 1800만의 작은 나라 한국은 아시아 거대 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이 거의 희박해졌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점차적 영락의 길을 걸으면서도 고유의 독자성을 잃지는 않았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주권을 잃고 일본 제국에 병합되고 말았으니 이 격변기에는 자신을 지키기도 어렵게 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속국으로서 억지로라도 새 지배자에게 굴신해야 할 뿐 아니라, 겨레가 낯선 이민족에게 급속히 동화되는 모습까지 보아야 할 처지게 되었다. 한반도 병합 이후 속절없이 흐른 몇 년 사이에 숱한 한국 민속이 사라져 버렸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도 급격히 그 전철을 밟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쪽)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청량리 홍릉 무인석’, 유리건판, 1911년 2월 25일 청량리 홍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시신 불 태워져 2년간 장례도 치르지 못해
1911년 2월 25일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비운의 죽음을 맞았던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을 찾았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 일제에 의해 살해됐다.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 주도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역사는 이를 ‘을미사변’으로 기록한다.
“혼돈의 시대였다. 1894~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한국을 중국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켰으나 이는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의도적 방책이었을 뿐이다. (?) 1895년 10월 8일 60여 명의 자객이 궁궐을 범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시신을 밖으로 끌어내 멍석과 옷가지를 덮은 후 불을 질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자객들이 은밀히 잠입하여 일을 치른 후 탈출할 수 있도록 일본군 수비대가 사전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에는 드라마의 종장을 서둘러 끝내 버릴 길이 열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종 황제의 폐위와 한일병합이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96~98쪽)
명성황후는 시신이 불태워져 2년간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다가 1897년 11월 21일 국장을 치른 후 황후가 입던 옷을 시신 삼아 겹이불과 겹옷을 입혀 청량리 홍릉에 안장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자신이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 가운데 한 명이었고 분명 조국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명성황후의 홍릉에 수도자들과 함께 올랐다.<사진 1> “재실 바로 뒤에 솟은 것이 능이다. 약 10m 높이의 구릉에 지름 약 10m의 평지를 조성하여 그 한복판에 능을 꾸몄다. 봉분은 지면 위로 높이 돋우고 잔디로 덮었다. 묘혈은 그 아래 있었다. 능의 배후를 반원형 담장으로 둘러쳐 봉분을 보호했는데 봉분과 담장 사이의 공간은 사자나 양 같은 큼지막한 화강암 동물 상을 세워 두기에 충분했다. 동물 상의 머리는 담장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 동물들은 명부에서 안식하는 왕비의 수호자로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1~102쪽)
베버 총아빠스는 홍릉으로 가는 길에서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을 무거운 마음으로 되새겼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가 한국의 주인이 되면 가톨릭 선교 활동은 더 이상 없고 선교사들을 서서히 말살시킬 것입니다. 새 선교사도 더는 못 옵니다”라고 했다고 뮈텔 주교에게 직접 들었다. 그래서 베버 총아빠스는 “선교의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이 전혀 애석하지 않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청량리 홍릉과 아이들’, 유리건판, 1911년 2월 25일 청량리 홍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친일 세력에 의해 조성된 ‘음울한 장소’
홍릉의 검은 화강암 비석 앞에 선 베버 총아빠스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1911년 한국을 바라본 베버 총아빠스의 감정은 이랬다. “밀어닥치는 이민족들에 맞서 국가로서의 자신을 지킬 희망이 그나마 남아 있었을 때는 철저한 학교 교육을 통해 서양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구할 희망의 닻에 절망의 힘으로 매달렸다. 적어도 백성들은 그랬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정치적· 경제적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547쪽)
베버 총아빠스는 홍릉을 지키는 육중한 무인석을 보고선 그나마 위안을 느꼈을 것이다.<사진 2> “기골이 장대한 시종 무관 두 기가 보였다. 무거운 제복 차림의 석조 시종 무관들은 왕비의 공덕이 기록되어 있을 법한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손아귀가 억세 보였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2쪽)
홍릉은 고영희 등 친일 세력에 의해 조성됐다. 그래서인지 베버 총아빠스는 홍릉을 ‘음울한 장소’라고 표현했다.<사진 3> “이 음울한 장소 위로 나뭇가지들이 장중한 침묵 속에 드리우고, 초록의 벽이 되어 뭇사람의 아우성을 방파제처럼 든든히 막아 주었다. 노을빛 불타는 먼 산봉우리만 이곳을 굽어보며 무덤 속에 잠든 왕비의 권력을 지켜주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기가 여느 무덤과 달랐다. 공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능의 안식을 방해할까 두려웠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