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강 운하에서 바라본 생드니 대성당. 파리 북쪽의 생드니는 순교자 디오니시오 성인의 무덤이 있는 순례지이자 프랑스 왕들의 묘지가 있는 국가 성지다. 센강과 연결된 운하가 도시 중심부와 생드니 대성당 방향으로 흐른다.
참수된 후 머리 들고 걸어간 성 디오니시오
저마다 아는 것만 본다는 괴테의 말이 있습니다. 생드니란 이름에 축구팬들은 그곳에 있는 월드컵 경기장 ‘스타드 드 프랑스’를 떠올릴 테고, 역사 마니아는 고딕 양식의 원조 생드니 대성당을 생각할 겁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어떨까요? 생드니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서 울려오는 신비롭고 경건한 울림이자 기적과 희망의 장소입니다.
생드니의 역사는 참수된 후 자기 머리를 손에 들고 걸어간 성 디오니시오의 성담(聖譚)에서 시작됩니다. 프랑스 이름으로 드니(Denis)인 디오니시오는 고대 로마인 데키우스 황제 시기 갈리아로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 중 한 명입니다. 250년경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메르쿠리우스 신전이 있던 언덕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순교자의 언덕’이란 뜻인 몽마르트르 지명이 여기서 유래하지요. 그 다음 이야기가 인상적인데요, 디오니시오는 참수된 후 벌떡 일어나 자기 머리를 두 손에 들고 약 6㎞를 걸어 자신이 묻히고자 하는 장소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오늘날 생드니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드니 대성당과 서쪽 정면. 길이 108m·너비 39m·높이 86m의 장대한 구조의 성당으로 중세 고딕 건축의 시작을 알렸다. 1846년에 북쪽 탑이 노후되어 무너져서 남쪽 탑만 남은 모습인데, 최근 복원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중앙문에는 최후의 심판·천국과 지옥의 모습, 왼쪽 문에는 성 디오니시오와 동료들이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장면, 오른쪽 문에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만찬을 나누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파리 신앙 전통의 뿌리 생드니
이 극적인 전설로 일찍이 순례가 시작됐습니다. 5세기 중엽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성 제노베파는 왕실의 도움을 받아 성 디오니시오와 동료 순교자들의 무덤에 소성당을 세웁니다. 성녀는 파리와 주변 지역의 순교자들을 깊이 존경했기에 성 디오니시오의 순례지를 조성한 것인데요. 이를 계기로 생드니는 파리 신앙 전통의 뿌리이자 프랑스를 수호하는 성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성 제노베파는 평신도이지만 수도자처럼 살면서 사회와 교회 안에서 백성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활동한 중세에 보기 드문 여성이었습니다. 아틸라가 훈족을 이끌고 파리를 향해 쳐들어오자 파리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단식하며 하느님의 보호를 청하자고 공동체 믿음을 북돋웠지요. 실제로 아틸라 군대는 오를레앙으로 방향을 틀면서 파리는 전란을 피하게 됩니다. 프랑크 왕국이 파리를 포위했을 때 백성을 위해 센강 상류인 트루아까지 가서 식량을 구해온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후 프랑크 왕들은 성녀에게 감화되어 파리를 보호했고, 생드니 순례지도 왕실의 의미 있는 장소로 탈바꿈합니다.
생드니 대성당의 성모 소성당. 이곳에 성왕 루이의 성해를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 스테인드글라스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것으로 아래쪽 두 패널은 12세기에 쉬제 아빠스가 제작했고, 나머지는 1849년 외젠 비올레르뒤크 등이 복원했다. 성모 마리아 앞에서 무릎 꿇은 쉬제르 아빠스 본인 모습이 담겨있다. 오른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인 ‘이사이의 나무’ 등을 주제로 했다.
구원에 대한 프랑스 왕가 신심의 상징
7세기 다고베르투스 1세는 이곳을 관리할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합니다. 그리고 수도원 성당을 자기 묘소로 지정해 왕실의 전통적인 안식처로 삼지요. 그 후 생드니 수도원 성당은 수 세기 동안 증·개축을 거듭하며 성인 공경의 장소를 넘어 프랑스 왕들의 가장 중요한 묘역으로 발전합니다. 성 루이·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국왕의 영원한 안식처였고, 현재 42명의 왕과 32명의 왕비, 여러 왕자와 공주의 무덤이 있지요.
세속 군주들이 생드니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신앙심을 기반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성인 가까이에 묻혀 구원받고 싶은 신앙심이 더 컸습니다. 이후 카페 왕조의 후원 아래 생드니의 상징성은 더욱 커졌고, 생드니 수도원도 왕국의 영적이며 정치적인 중심 기관으로 자리 잡습니다.
주 제단과 내진의 스테인드글라스. 쉬제 아빠스는 카롤루스 왕조의 성해를 모신 지하 소성당을 유지한 채 개축했기에, 다른 고딕 성당과 달리 주 제대가 있는 제단과 회중석 사이에 높이 차이가 있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빛의 예루살렘
메트로 13호선 종착역에서 나와 받는 생드니의 첫인상은 파리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번화가 사이로 현대식 아파트가 보이는 여느 도심 풍경 같습니다. 하지만 대성당이 가까워질수록 거리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고, 건물 지붕 너머로 솟아오른 고딕 양식 특유의 첨탑이 나타납니다.
성당에는 초기 전설 못지않게 흥미로운 건축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2세기였습니다. 당시 루이 6세의 친구로서 영적·정치적 조언자였던 쉬제(Suger) 아빠스는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을 하느님께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돌과 유리, 그리고 빛으로 구현합니다. 1135~1144년 쉬제 아빠스는 좁은 옛 수도원 성당의 서쪽 정면과 세 개의 문, 빛으로 가득한 제단을 증·개축합니다. 뾰족아치·교차 리브볼트·대형 장식 창문 등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높은 곳으로 이끌며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감을 창조하지요. 바로 빛을 신성한 요소로 이해하고 활용한 고딕 양식의 탄생이었습니다.
생드니 대성당의 왕실 묘역.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무덤(윗 사진 앞편 묘실, 아래)은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세밀한 부조, 상징적인 인물상, 복합적인 구조를 통해 삶과 죽음, 지상과 천상, 육체와 영혼을 표현했다.
이런 의미 있는 성당도 프랑스 혁명 시기에 극장과 창고로 쓰이며 크게 훼손되고 맙니다. 성해와 성유물도 사라지고, 왕실 묘역도 파괴됐죠. 지금의 성당 내부는 19세기 루이 18세 치하에서 복원한 모습입니다만, 외관은 여전히 옛 원형을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당 주 제대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비치는 감미로운 빛에서 12세기 순례자들에게 ‘천상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려 했던 쉬제 아빠스의 손길을 여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주 제대 주변에 묘비 위로 두 손을 합장한 채 눈을 뜨고 누워 있는 조각상들이 보입니다. 구원을 열망하며 순교자의 그늘에 안식을 취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죽음을 넘어 기도하는 존재로 형상화된 이 조각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발상이었지요.
생드니 대성당은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장소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빛을 통해 천국을 열망했던 사람들의 꿈,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신앙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지친 우리에게도 생드니 대성당이 순교자의 숨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다시금 힘을 얻을 수 있는 은총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순례 팁>
※ 샤를 드골 공항 가는 길에 있다. 파리 시내에서 메트로 13호선 종착역 ‘바실리크 드 생드니’역에서 하차하거나 트램 T1 노선을 타고 ‘생드니-포르트 드 파리’역에서 하차 후 도보로 이동. 단, 파리 북부 지역은 치안 문제로 주간에만 방문할 것!
※ 생드니 대성당 미사 시간 : 주일 및 대축일 08:30·10:00·18:30, 평일 09:00. 미사 시간이 아닌 경우, 왕실 묘역과 지하 성당은 유료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