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팔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 나팔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참혹한 장면은 기어이 등장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심판이 징벌이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라는 사실을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다.(6월 1일자 19면) 무서운 심판의 서사라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방식으로 전개된 하느님의 호소는 일곱 나팔의 이야기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나팔이 불릴 때마다 ‘종말이다’, ‘심판이다’라는 건조하고 상투적인 해석으로 하느님의 간절한 호소를 이해하는 건 게으른 것이다.
심판의 서사가 어떻게 묘사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지상의 것들이 무너지고 파괴되며, 땅의 삼분의 일이 사라지고 제거되는 장면이 도대체 하느님의 초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심판의 끝, 그러니까 일곱 나팔의 소리가 완전히 울려 퍼졌을 때, 하늘은 왜 여전히 하느님을 찬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묵시 11,15)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요컨대, 심판의 참혹함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왜 필요한 것인지 묻는 일이 일곱 나팔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된다.
처음 네 개의 나팔은 땅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땅에 떨어진 우박과 불, 불타는 큰 산과 바다, 그리고 쓴 물 등이 그렇다. 땅의 것들이 제 모습과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하나의 ‘상실’이나 ‘파괴’로 이해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다만, 그 심판은 옛날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매우 닮았다. 우박과 불이 땅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이집트 재앙의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탈출 9,24-25 참조)
요한묵시록 저자는 ‘피가 섞인 것’으로 우박의 성질을 더욱 섬뜩하게 서술한다. 이집트 재앙 첫 번째에 나타나는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한 장면이나(탈출 7,17 참조) 요엘서 3장 3-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날의 징조를 우박에 접목해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간다.
핏빛의 우박이나 불구덩이가 된 땅의 서술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로부터 2000여년 전 벌어진 사건의 이야기이지만, 유다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요한묵시록이 쓰인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위한 메타포의 한 예로 작용하고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 어렵고 힘든 일을 제 삶의 현실을 위한 하나의 메타포로 끌어다 사용했고, 성찰과 회개의 소재로 다루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66년에 발발한 유다 1차 항쟁이었다. 로마에 저항함으로써 유다 민족의 독립과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 결말은 하느님의 자리라 여겨진 예루살렘 성전의 불바다였다.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었고, 그로 인해 절망했으며, 그것으로 세상은 그 끝에 다다랐다고 모두 생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서술하면서 유다 1차 항쟁의 역사를 끌어온다. 그 역사는 끝장난 역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시발점으로 해석된다. 불타 무너진 성전을 예수님의 몸으로까지 해석하면서 역사의 고통을 믿음을 향한 다짐으로 어떻게든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으로 대변되는 심판에 대한 서사의 기능이다.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의 땅은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로 믿음과 삶이 완전히 무너질 때, 그 절망의 무게감에 사람들이 허덕일 때, 강렬한 심판의 형상으로 수없이 호출되지만, 혹독한 그 고통의 기억만큼이나 새로운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배가 된다. 둘째 나팔이 말하는 불타는 큰 산, 셋째 나팔이 불릴 때 나타나는 쓴 물, 넷째 나팔의 어둠 등이 차례로 서술되면서 심판이라 해석되는 여러 서술은 더욱 단단해진다.
참혹한 일로 믿음이 무너질 때
희망에 대한 간절함도 커져
이웃과 세상 고통 마주하며
그들의 아픔 함께 살아내야
그러나 다시 한번 되새기자면,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불리는 순간, 그곳은 하늘이다. 구원의 환호가 울리는 하늘, 하느님께 찬미 찬양이 드려지는 하늘. 어쩌면 하늘을 기다리기 위해선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끝내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삶은 필연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심판의 대상이 ‘삼분의 일’로 규정된다는 점을 살피며 심판의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심판은 전체가 아닌, 부분의 일이라고 안도한다.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류가 끝장나는 것이라서 믿는 이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 이런 해석은 뭔가 원시적이고 천박하다. ‘삼분의 일’과 그렇지 않은 ‘삼분의 이’를 갈라놓고 적어도 나는, 우리는 그 ‘삼분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해석은 가소롭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이런 해석을 두둔하며 ‘삼분의 일’의 회개를 주문한다. 심판의 징벌을 통해 속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따르라는 이런 주문은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죄다 윤리적, 율법적 일탈로 편협하거나 게으르게 해석한 결과다.
이런 해석에 예수님의 일갈은 긴요한 것이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 역사 속에 벌어지는 참혹한 사건들을 심판의 형식으로 다시 복기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경고나 일탈에 대한 징계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게 아니다. 그 참혹한 사건들이 제삼자의 일이라서 무심한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 혹은 전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시대 공감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말자. 시대의 아픔에 무감각하게 살지 말자. 저만의 신앙을 지킨다고 이웃과 사회의 슬픔에 눈감지 말자. 핏빛의 우박과 불구덩이는 우리 사회 도처의 아픔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나팔이 울리듯, 세상의 고통과 아픔은 더욱더 알려지고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삼분의 일’과 ‘함께’ 그 고통과 아픔을 살아내어야 한다. ‘삼분의 이’의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팔이 모두 울려야 구원은 온다. 나팔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구원은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