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스베르크코겔에서 바라본 산악 철도인 제머링 철도. 옛 20실링 지폐에 이 풍경이 실려서 ‘20실링 풍경’이라고 불린다. 매우 험난한 지형과 상당한 고도차를 감안하면 세계 최초의 진정한 산악 철도로 꼽힌다. 1998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칼테 린네 위의 고가교(길이 185, 높이 46m), 암벽 아래의 폴레레스 터널, 크라우젤-클라우제 고가교, 작은 크라우젤 터널이 보인다.
오스트리아 동부의 알프스 산기슭 제머링 고개 초입에 오랜 세월 수많은 순례자의 발걸음을 끌어온 ‘은총의 자리’가 있습니다. 빈에서 제머링 고속도로 S6를 타고 그라츠로 가다가 중간쯤서 만나게 되는 마리아 슈츠(Maria Schutz)인데요. 200명이 남짓 모여 사는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그 영성의 깊이만큼은 여느 성지에 못지않습니다.
해발 984m의 제머링은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슈타이어마르크를 잇는 알프스산맥의 주요 관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부 통상로이자 군사 이동 경로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개였습니다. 특히 1854년 완공된 제머링 철도는 고도 1000m가 넘는 세계 최초의 고산 철도이자 기술적 혁신의 상징이지요. 당시 공학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도전 덕분에 이곳 교통로가 정비되어 현재 쉽게 성지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존벤트슈타인 산기슭에 자리한 마리아 슈츠. ‘제머링 지역의 보석’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산록 마을로 니더외스터라이히주(州) 남부의 쇼트비엔(Schottwien)에 속해 있다. 빈과 그라츠 두 대도시의 중간 지점에 있고, 열차나 고속도로가 모두 이 근처를 지나가기에 반나절 순례가 가능하다.
마리아 슈츠 순례 성당(가운데)과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수도원(왼쪽). 빈 대교구의 글로그니츠 교구 소속 순례 성당으로 17~18세기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사람들이 이곳 샘물을 마시고 치유되면서 순례지가 조성됐다. 1925년부터 예수 고난회가 순례 사목을 맡고 있다.
성모님 보호 아래 마련된 은총의 장소
빈에서 출발한 기차는 1시간이면 글로그니츠역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출발한 지역 버스가 쇼트빈 마을을 지나 산기슭으로 난 도로를 오르면 저 멀리 제머링 능선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서서히 마리아 슈츠 순례 성당의 종탑이 시야에 들어오지요.
마리아 슈츠의 역사는 17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79년 쇼트빈에 전염병이 만연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을 북쪽 산기슭에 격리했는데, 그곳에서 샘물을 마시고 치유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전염병이 잦아들면 감사의 의미로 소성당을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지요.
그 무렵 여기서 10여㎞ 떨어진 마을에 사는 여인에게 성모 마리아가 꿈에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여인에게 “초 두 개를 내게 봉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렸다고 합니다. 1년 후 그녀는 다시 같은 꿈을 꾸었고, 마침내 성모님이 초를 봉헌하라고 하신 장소가 이곳인 줄 알았고, 샘물을 마시고 완전히 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기적적인 치유와 성모 마리아의 발현으로 1721년 드디어 샘터에 성모님께 봉헌된 소성당이 세워지게 됩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인근 마을 출신 프란치스코회의 자이프리트 신부가 이곳에 도착하게 됐습니다. 산행에 지친 신부가 자작나무 아래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대자연 속 성당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만일 나중에 성당을 봉헌하게 된다면 성모님께 봉헌하고 마리아 슈츠라고 부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모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아름다운 은총의 장소라고 느낀 것이죠.
시간이 흐르면서 순례자들의 방문이 증가함에 따라 성당이 크게 확장됐습니다. 1728년에는 현재의 바로크 양식의 성당 건축이 시작되어 1738년에 완공됐습니다. 바로크 미학의 핵심인 천상과 인간의 만남, 곧 하느님 사랑과 자비가 내린 순례지가 성모님을 통해 탄생한 것이죠.
주 제대 뒤편의 ‘거룩한 분수’(왼쪽). 샘이 솟던 자리에 소성당을 짓고 작은 분수를 만들었다. 오른쪽 사진은 이 샘물을 마시고 기적을 체험했던 순례자들이 남긴 봉헌판과 기념물이다.
마리아 슈츠 순례 성당의 주 제대. 마리아 슈츠 샘터에서 일어난 기적과 병든 여인의 꿈에서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을 재현했다.
현재도 기적을 낳는 거룩한 샘
마리아 슈츠 순례 성당 정면은 두 개의 탑이 균형 잡힌 구조로 중앙 곡선 지붕과 함께 조화를 이룹니다. 성당 내부의 흰 벽은 단출하지만, 높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에 제대와 강론대의 화려한 장식이 황금빛을 발합니다.
주 제대에 자리한 성모상의 모습에서 이곳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습니다. 산 위로 성모님이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셨는데 왼쪽에서 천사가 은총의 장소 위로 장미꽃을 듬뿍 뿌리고 있고, 아래 두 천사는 “거룩한 샘이라고 불리는 곳”이란 문구가 적힌 깃발을 펼치고 있지요. 성모님은 넓게 펼친 망토로 아이들과 신자들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데, 중세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자주 쓰인 도상입니다.
주 제대 양옆 보조 제대에는 수많은 봉헌판과 작은 선물들이 보입니다. 이곳을 찾았던 이들이 경험한 치유의 흔적과 감사의 표시들입니다. 사진 한 장, 아기 신발 한 켤레, 단순한 나무 십자가 하나에도 순례자의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성당의 주 제대 뒤에는 많은 순례자가 마시고 치유와 은총을 간구한 샘물이 솟는 작은 분수가 있습니다. 이 물로 병이 나은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았다고 하는데, 이곳에 계신 수녀님은 최근까지도 현대과학으로 이해하기 힘든 기적이 일어났다고 설명하십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4월 초 이곳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포탄과 수류탄이 성당으로 날아들었지만, 성모님이 보호의 망토를 펼치셨는지 기적처럼 성당에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좌측 소성당에서 순례자들이 모여 봉헌하는 로사리오 기도가 들려옵니다. 성당에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가 마치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심장박동처럼 다가옵니다. 순례는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여정입니다. 마리아 슈츠에서 우리가 성모님의 보호 아래 살고 있다는 것, 늘 하느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 하느님의 깊은 섭리 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순례 팁>
※ 빈과 그라츠의 중간 지점으로, 오가면서 들르기 좋다. 마리아 슈츠에 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차편이다. 기차로는 빈 중앙역에서 출발해 글로그니츠(Gloggnitz)역까지 온 뒤(1시간 소요), 택시를 타거나 343번 노선버스를 이용해 마리아 슈츠에서 내리면 된다.(20분 소요, 두 시간에 한 대 배차 //www.retter-linien.at/)
※ 마을 초입에는 순례자와 등산객이 머물 수 있는 호텔과 레스토랑이 있으며, 수도원 피정의 집 ‘마리엔호프(Marienhof)’가 있다.
※ 1925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가 순례 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미사 시간: 주일과 대축일 8:00·9:00·11:00, 평일 9:30. 묵주기도 : 월~토 9:00, 금 19:15, 성체조배: 월~금 10:00~17:00, 십자가의 길: 금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