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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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은 한국 교회 불굴의 신앙과 인내의 승리 표지”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2. 주교좌 명동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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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전경’, 랜턴슬라이드, 일제 강점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순교자 후손의 집터에 세워진 명동대성당

“고딕 양식으로 높이 솟은 주교좌 성당에는 십자가가 하늘 높이 달려 도시를 비추고 있다. 십자가는 만백성을 빛으로 인도하는 이정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7쪽)

이번 호는 명동대성당이다. 명동(明洞)은 조선 시대 한성부 행정구역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에서 유래한다. 일제강점기에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밝은 마을’이라는 뜻을 담아 ‘명동’이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 땅은 ‘종현(鐘峴)’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가 숭례문의 종을 떼다 남산 자락인 이곳 언덕배기에 걸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헌종·철종·고종 세 임금을 모시고 홍문관 제학과 황해도 관찰사·병조판서를 지낸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의 집터에 세워졌다. 평생을 청빈하게 산 그에게 고종이 저택을 내렸지만 가난한 형편에 도저히 살림을 꾸려갈 수 없어 윤정현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윤태경이 조선대목구에 팔았다.

윤정현의 아버지 남원 윤행임은 정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이로 1801년 신유박해로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가 그곳에서 참형을 당해 순교했다. 명동대성당은 순교자 후손의 집터에 세워진 것이다. 또 인근에 첫 순교자 김범우(토마스)의 집도 있었다.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1892년 8월 기공해 1898년 5월 29일 축복식을 했다. 대성당이 조선 왕조 임금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워 풍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해서 소유권을 억류당하는가 하면 청일전쟁 여파로 중국인 기술자들이 귀국하고, 반복되는 기둥 붕괴 등으로 성전 건립 공사에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명동대성당 제대’, 유리건판, 일제 강점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한양에 천주당을 세우니 부역에 나서라”

명동대성당은 건립 당시부터 ‘뾰족집’으로 서울 장안의 명물이 돼 많은 구경꾼이 매일 몰려들었다.<사진 1> 코스트 신부는 고향에 있는 몽펠리에 주교좌 성당을 본떠 명동대성당을 설계했다. 성당 규모는 길이 68m, 폭 29m, 종탑 높이 47m, 전체면적 2023㎡다. 성당 건립 당시 조선대목구는 전국에 편지를 띄워 “한양에 천주당을 세우니 모두 부역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이에 조선의 1만 4500명의 신자는 농사철을 피해 괴나리봇짐 메고 명동에 도착해 보름 이상씩 부역을 하고 돌아갔다. 순교자의 땅 위에 신자들의 희생으로 지어진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베버 총아빠스의 표현대로 서울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만백성의 이정표로 우뚝 서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거의 완벽하게 지어진 로마 가톨릭 대성당은 주교관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보육원을 포함한다. 이 건축물은 폐쇄된 도성의 변화를 보여 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표지다.”(이사벨라 비숍, 「조선과 이웃나라」 38쪽)

대성당의 중심은 십자가와 감실을 품고 있는 대리석 제대다.<사진 2> 이 제대판 아랫면에는 봉헌 연도인 1898년과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서명이 음각돼 있다. 지금의 명동대성당 제단부와는 사뭇 다르다. 현재 미사 때 사용하는 나무 제대는 1925년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을 기념해 제작됐다. 이 ‘복자 제대’와 함께 79위 시복을 기념해 제단 뒷벽에 ‘14 사도상’이 제작·설치됐다. 장발 선생의 작품인 14사도상은 열두 사도 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가 추가돼 있다. 1911년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명동대성당 제단 사진에는 복자 제대와 14사도상이 보이지 않는다.
 
‘명동대성당 강론대’, 랜턴슬라이드, 191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숭공학교 학생들이 느티나무 강론대 제작

1915년 3월 11일 뮈텔 주교는 명동대성당에 강론대가 설치된 것을 보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사진 3> “아침에 대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가 새 강론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미사 후에 찬찬히 살펴보니 참으로 뛰어난 목공 작품이었다. 완벽했다. (?) 아빠스가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나의 주교 성성 은경축 기념 선물로 느티나무 강론대를 제작하라고 숭공학교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푸아넬 신부가 치수를 정확히 재어 건네주었고 카예타노 피어하우스 신부가 수사들과 학생들과 함께 제작에 들어갔다.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강론대 위의 천개는 피정 때까지 완성된다고 했다.”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다. 일본이 연합국에 참여하는 바람에 프랑스와는 아군이 됐고, 독일과는 적성국이 됐다. 한국의 프랑스와 독일 선교사들이 징집돼 적으로 서로 싸웠다. 참전한 선교사 중에는 전사자도 있고 일본군 포로가 된 독일인 수사들도 있었다.

“한국에 진출한 오틸리아 연합회의 백동 수도원은 전쟁 때문에 수도원 안에서 조용히 지내야 한다. 행동의 자유는 제한되고 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고해성사 말고는 모든 선교 활동이 불가능하다. (?) 지금은 절박한 시대다. 이 민족이 속수무책으로 일본화되어 가고 있다. 그에 따른 난제와 장애가 해마다 증대하는 형편이다.”(백동 수도원 연대기 1917/1918년 135쪽)
‘명동대성당 베네딕토 성인상’, 랜턴슬라이드, 일제 강점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정부, 모든 수단 동원해 성당 건립 저지

명동대성당 오른편 소제대 위에 베네딕토 성인상이 설치돼 있다.<사진 4> 성전 건립 당시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너무 많이 닥치자 당시 명동대성당 건립을 추진하던 제7대 조선대목구장 귀스타브 마리 장 블랑 주교가 베네딕토 성인에게 기도하며, 성인께서 도와주시어 일이 잘 처리되면 대성당에 성인을 위한 경당을 지어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단다. 뮈텔 주교는 대성당이 완공된 후 블랑 주교의 약속대로 베네딕토 성인상을 지금의 자리에 설치했다.

“이 도시의 가장 멋진 곳에 그리스도인들의 성당이 우뚝 솟아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한국 정부는 근심에 잠겼다.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옛 임금들의 위패가 모셔진 종묘가 있는데 언덕 지반 공사 때문에 조상들의 안식이 방해받는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 언덕은 왕실 소유지라고 했다. 선교사들이 개인과 체결한 매매 계약서는 무효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의 ‘법무대신’은 그 부지의 취득에 관계한 중개인과 거간꾼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 또 법무대신은 신학생들이 허물어진 담을 넘어 궁궐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그들을 체포해 여러 달 가두어 두었다. (?) 명동대성당은 정부가 허락한 종교 자유의 표지도 아니요, 항구를 내려다보고 우뚝 솟아 있는 청도나 다르에스살람의 교회들처럼 식민 열강의 군림을 나타내는 표지도 아니다. (?) 명동대성당은 한국 교회 불굴의 신앙과 인내의 승리 표지다.”(「분도통사」 87~89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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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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