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Trinity)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 중 하나이지만, 초대 교회 사도들이 구체적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다. 후세의 신학자들과 교부들이 성부·성자·성령이 성경에 언급된 것을 숙고하면서 시작되었다.
삼위일체론은 신의 본질을 다루는 영역에 속한다.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못하는 명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는 ‘신비’로 인식되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범주라고 신학자들은 규정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쉽게 풀어 물·얼음·수증기는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전부 똑같은 ‘H2O’라는 물질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설명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이 세 형태가 동시에 존재하지 못하기에 형태의 동존이 자유로운 삼위일체론과는 거리가 있다. 양자역학에서 입자 파동의 이중성이나 블랙홀의 특이점을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당연히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많은 이가 음악에서 수리적인 구조와 논리성을 연구했다. 피타고라스는 음정의 어울림을 계산해 음계를 만들었고, 독일의 음악분석가 하인리히 쉥커(Heinrich Schenker)는 음악의 구조를 언어의 구조에 적용하고 도형화해 시각화했다.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을 예술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우리가 꽃을 볼 때 꽃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지, 식물학적인 지식이 미감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예술의 ‘논리적’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감각적인 이해는 후대에 ‘미학’이라는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작곡가의 입장에서 음악을 만들 때에는 큰 구조를 생각하고, 멋진 주제를 선택하며, 이 주제를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보통 10분짜리 피아노곡일 경우 빠른 템포라면 2000~3000개의 음표가 필요한데, 이 모든 음이 제자리에 놓여있도록 고심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딱히 논리적으로 근거가 없지만 특정 자리에 결이 다른 음표를 넣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릴 때가 많다. 이 어색한 음이 잘 전개되면 음악의 매력이 되고 개성으로 변하지만, 잘못 운용하면 그대로 ‘실패작’이 된다.
음악의 논리성은 말과 비슷하기 때문에 반복할수록 명확해지지만 지루해지며, 같은 내용을 매력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좋은 작곡가는 절묘한 균형을 본능적으로 찾아내곤 한다. 작곡할 때 쓰이는 재료는 크게 가락·리듬·화성이지만, 내부의 변형과 조합에는 셀 수 없을 만큼 각기 다른 방향성이 존재한다. 이 모든 요소가 음악이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음악이라고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나름 신비로운 현상이다.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를 고작 음악으로 설명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만, 주님이 인간에게 준 멋진 선물이기도 한 ‘음악’으로 주님의 신비를 엿보는 것이 그다지 무례한 일은 아닐 것이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https://youtu.be/yLV8VH98pL0?si=stSkYKGCCZ7DmyO4
류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