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간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손으로 행한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만이 숭배하는 우상을 끝내 움켜쥔다. 죽음의 재앙도 인간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다.
대개 재앙의 서사를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일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앙의 성격은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려 정의의 단호한 심판을 재앙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묵시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재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질만한 소재가 요한묵시록 9장 13절 이하에 눈에 띈다. 재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에서부터 그 질문은 시작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주어라.”(14절) 요한묵시록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등장을 알렸지만, 9장에서는 땅을 향한 재앙을 알리는 존재로 소개된다. 네 천사는 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다. 동쪽 끝을 가리키는 유프라테스는 미지의 무서운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창세 15,18; 신명 1,7; 1열왕 5,1; 에녹 56; 에제 38-39 참조)
네 천사는 인간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준비를 이제껏 해왔고 마침내 그 시간은 무르익었다. 네 범주로 소개되는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필연적이고 확실한 시간’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의 은유적 시간이다.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 건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삼분의 일의 죽음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은 품고 있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부터 오는 재앙은 인간들이 그렇다고 믿은,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을 먹이 삼아 커나간다.
이 두려움은 유다 사회가 오래전부터 믿어온 하나의 ‘민간 신앙’이다. 묵시주의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발판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다. 동쪽에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심판의 재앙, 그것이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재앙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심판하고 정제하고 다잡는 인생의 길잡이로 재앙을 쓰고 읽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다듬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잡이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선명하면 좋을 터. 제 삶이 더욱 반듯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절부터 기병대가 나타난다. 기병대는 ‘이억’의 숫자로 소개된다. 그리스말 본문은 ‘디스뮈리아데스 뮈리아돈’(δισμυρια?δε? μυρια?δων)으로 되어 있는데, 굳이 직역하자면, ‘만(萬)들의 이만(二萬)’, 그러니까, 2×10,000×10,000= 200,000,000이 된다. ‘만’(萬)을 가리키는 ‘뮈리아스’(μυρι??) 는 ‘대단히 많은’ 혹은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숫자는 셈을 하기보다 셈을 하지 않는 게 맞다. 다만 우리는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내포하는 두려움의 극단을 읽어내야 한다. 인간이 삼분의 일이나 죽어가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두려운 만큼 황망한 일이라는 것. 그 옛날 소돔의 멸망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억의 기병대가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은 소돔이 종말을 맞닥뜨릴 때 결정적으로 등장한 상징체들이다.(창세 19,24.28 참조)
그러나 인간이란 참 질기고 억세다. 우리가 만든 것들,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 그리고 우리가 지탱해 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인간의 욕구는 숭배 대상에 정확히 투사된다.
불의한 자 심판받는다는 서사
민중 스스로 다듬어온 신앙
정작 욕망 포기 않는 이들은
회개할 의지 없이 우상숭배
숭배는 자기의 인정 욕구에 대한 숭배가 되어버린다.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숭배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숭배하는지 모른 채 그 무엇을 늘 찾아다닌다. 타자화해 놓은 것은 실은 자신을 투사시킨 지독한 교만과 이기(利己)의 신기루가 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다.
끝끝내 자기를 두고 숭배하는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다.(21절) 회개하지 않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전통적 인식 아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끝을 파멸이나 징벌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제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은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의 재앙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은 실은 복된 이들이기도 하겠다. 제 잘못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은 정의나 선에 대한 갈증이나 존중을 내포하고 있어, 죽어간 인간의 삼분의 일은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삼분의 일의 죽음은 그리하여 스스로 회개할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손짓이 아닐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행여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일까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 앞에 아무런 감정의 요동을 표하지 못(안)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얼마나 죽어야 그 완고함이 해제될까. 얼마나 참혹해야 저만이 옳다고 믿는 그 우상을 던져버릴까. 이억의 기병대가 오기 전에, 그리하여 또 다른 죽음이 닥치기 전에, 헛된 우상에 물든 이들에게 우리는 담대히 재촉해야 한다. 얼른 회개하라고….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