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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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벗들과 교우촌 일구고 담배 농사 지으며 믿음살이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3.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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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담배를 피우는 베버 총아빠스와 선교사들’, 유리건판, 1925년 10월 내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박해 피해 산으로 숨어든 신자들도 큰 고통

“가장 무서운 고문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하염없이 놔두는 것이다. 이 담장들에 나무판자로 된 가건물이 기대어 세워져 있는데, 빛과 공기가 작은 문을 통해서만 스며들어 온다. 이 감옥 안의 추위와 더위는 견디기 어렵다. 좁은 공간에 빽빽이 들어차 있어 순교자들은 눕지도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고문당하다 맞은 상처에서 나는 피와 고름이 거적 위로 흘러내렸다. 악취는 엄청나게 역겨웠고, 페스트 같은 질병들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수감자들을 너무나 무섭게 괴롭힌 나머지 용감하게 고문을 견뎌 내며 신앙을 지키던 여러 사람이 결국 배교를 했다. 그들은 썩어 가는 짚도 먹어 보려 했고, 감옥 안에 득실대는 벌레들도 한 주먹씩 잡아먹었다.”(푸리에, 「한국의 순교자들」 110쪽)

“길이 1.5m, 폭 14㎝, 두께 3㎝의 널빤지로 정강이를 때리는데 15번 정도 때리면 뼈가 살 밖으로 드러난다. 더 많이 때리면 뼈가 부러진다. 1866년, 천주교인들은 이런 고문을 당했는데 60대까지 견뎌내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길이 90㎝, 폭 4㎝, 두께 6㎜의 가느다란 막대기로 죄인의 발바닥을 때리는 방식도 있는데 한 대 때리고 나면 막대기는 부러지게 마련이다. 털실을 꼰 끝을 다리에 둘러 잡아당긴다. 끈이 서서히 살을 파고들어 뼈에까지 이르는데 허벅다리 곳곳에 반복하기도 했다. 그 밖에 살점을 떼어 내는 방법, 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수염을 뽑는 방법 등도 있다. 고문의 방식과 시간은 관리 마음대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죄인이 고문을 받고 나면 심하건 덜하건 장애인이 되었으며 상처에는 그저 종잇조각이나 붙여졌다.”(포지오, 「한국」 73쪽)

모두 박해 시대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이다. 박해를 피해 산속 깊은 골짜기로 숨어든 산 자들도 순교자들 못지 않게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줄곧 도망 다니면서 끊임없이 숨어야 했다. 외교인들의 미신과 우상숭배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많은 신자가 산속이나 사람 살지 않는 외딴 곳으로 피해 들어갔다. 외교인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생각되면 가진 것들을 가능한 한 빨리 팔았다. 살 사람을 찾지 못하면 모든 것을 그냥 버려두고 당분간 덜 위험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며 다른 장소로 피했다. 이렇게 자주 도피하면서 많은 신자가 거지 신세가 되었다. 나는 가난한 조선인들의 현실적 곤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영하 10~12℃의 한겨울에 어린아이들이 거의 벌거벗고 추위에 푸르딩딩하게 언 채 비신자들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들과 숲에서 저절로 자란 풀뿌리와 물만이 신자들의 양식이다.”(성 샤스탕 신부 서한 중에서)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르 각 신부’,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담배 재배, 박해 시대 천주교인 경제 기반

박해 시기 이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신앙 공동체를 일구고 믿음살이를 했다. 산속 깊은 골짜기로 숨어든 교우들은 화전을 일구어 조와 밀·채소 등 여러 작물을 재배하며 연명했다. 그중 농토가 적고 노동력이 많은 교우촌에선 ‘담배’ 재배를 가장 많이 선택했다. 당시 담배가 최고의 기호 작물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이를 증명하듯 병인박해 당시 국가 기록에 천주교인 대부분이 화전민이라 적고 있다. 또 베르뇌·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들의 서한에는 교우들이 주로 담배를 재배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이처럼 담배 재배는 박해 시대 천주교인들의 주된 경제 기반이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면서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아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제에게 인사하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들은 공소 회장들을 연방 들여보내어서 인사하고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졸라댑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이 저의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그들이 보내는 애정의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어떤 때는 좀 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려고 산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뚝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최양업 신부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중에서)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복자 이성례(마리아)도 수리산 뒤뜸이에서 신앙의 벗들과 함께 교우촌을 일구고 담배 농사를 지었다. 담배 재배를 얼마나 많이 했으면 사람들이 이곳을 ‘담뱃골’이라 불렀겠는가.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의 사진에는 담배를 피우는 남성들을 촬영한 것이 적지 않다. 주로 교우촌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20세기 초반 당시에도 교우들이 여전히 담배 재배를 많이 했다는 방증이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화톳불로 담뱃불을 붙이는 남성’,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긴 곰방대 물고 있는 베버 총아빠스 일행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1925년 10월 함경도 내평성당을 방문했다. 내평성당은 산골짜기가 아닌 평야에 자리했지만 교우촌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던 신앙 공동체였다. 선교사들은 주민과 어우러져 살았고, 교회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한 한국의 전통 풍습을 장려했다. 박해를 견뎌낸 내평의 교우 대다수는 일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지켜가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했다. 이제 내평의 선교사들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다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살아야 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곳에서 한국의 전통 혼례식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전통 혼례식 촬영을 마치고 베버 총아빠스와 독일 선교사들은 내평성당 마루에 앉아 한가로이 담배를 피웠다.<사진 1> 기둥에 기댄 채 긴 곰방대를 물고 있는 이가 베버 총아빠스다.

베버 총아빠스는 내평에서 1911년 한국 여행 때 만났던 하우현본당의 르 각(Le gac)신부와 교우들을 떠올렸다. 내평성당의 모습이 얼추 하우현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분도통사」의 내평본당 부분은 베버 총아빠스가 하우현 교우촌을 회상하는 글로 시작된다.(292~293쪽) 르 각 신부도 어지간히 담배를 좋아했나 보다. 베버 총아빠스는 파이프를 물고 있는 르 각 신부를 촬영했다.<사진 2>

사실 선교사와 담배는 인연이 깊다. 신유박해 이후 교회를 재건하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1811년 이여진(요한)이 밀사로 북경에 갔을 때 어디로 가야 교우들을 만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들이 중국 신자들에게 담배 재배법을 알려준 것을 떠올리고 담배 장수를 찾아가서 마침내 교우를 만날 수 있었다.

‘화톳불로 담뱃불을 붙이는 남성’도 사진에 담았다.<사진 3> 부엌 앞에 홀로 앉아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들이키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이 고독을 넘어 ‘정심(正心)의 도량’을 느끼게 한다. 깊은 그의 눈이 미화되지 않는 삶의 격랑을 보여준다. 담뱃대보다 굵은 노인의 손마디들이 가난의 고통을 웅변하는 듯하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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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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