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씨가 먼저 떠나 보낸 외동딸의 사진을 보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고 하느님을 만났다는 그는 지금도 딸을 위해 매일 위령기도와 묵주기도 15단을 바치고 있다.
자식을 떠나보낸 이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을까. 외동딸을 먼저 보낸 김영수(루치오, 70)씨는 하느님께 따져 물었다. “나를 데려가시지 왜 하필 내 딸이냐”고.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고통의 심연을 경험하고 하느님 뜻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던 일을 멈추고 뒤늦게 신학 공부에 돌입했다. 그런 그는 이제 조금이나마 알게 된 하느님 뜻에 따라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을 위로한다. 폭풍 속에서 하느님을 만난 김영수씨의 이야기다.
성공한 사회인
김씨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이었다. 27세에 국영기업체에 들어가 8년을 근무하고, 국내 굴지의 의류회사로 옮겨 10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 후 12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기업의 재무 책임자이자 상장회사의 공시 책임자였다. 매일 기업 주가에 노심초사하고, 매년 회계 감사 후 주주총회에서 승인받아 공시하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스스로 ‘독사’ 기질을 타고났다고 하는 김씨는 “직장 생활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10 정도 받을 스트레스를 100 정도 받았다”며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견뎌냈다”고 말했다. 두 회사 근무 기간은 총 30년. 그는 직장인의 롤 모델, 성공한 사회인이었다.
기도로 얻은 딸
김씨는 목사가 여럿 나왔을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역동적인 개신교 분위기가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아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그런 그를 가톨릭으로 이끈 사람은 장인어른이었다. 김씨는 “이제껏 장인어른처럼 많은 시간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그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 인도됐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생일과 축일이 같은 루치오를 세례명으로 정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해 얻은 하느님의 선물, 딸 리디아가 태어났다. 오랜 산고 후 제왕절개를 통해 낳은 소중한 딸이었다.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유아세례를 받게 했다. 그는 “제 외모와 똑 닮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이었기에 한 명으로도 충분했다”고 전했다. “딸은 제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됐습니다.”
갑작스러운 외동딸의 죽음
김씨는 딸을 위해선 뭐든 다해주고 싶었다. “조기 유학이 유행이었던 당시, 본인이 강력하게 원해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내와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보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죠. 그렇게 기러기 아빠로 살았습니다.”
김씨는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그러다 대학교도 정해져 있었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 예쁜 딸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슬퍼할 새도 없었습니다. 먼저 귀국시키고, 캐나다에서 장례 후 납골 병에 담아 돌아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지?.”
김씨는 견디기 힘든 고통 앞에서 자책하고 분노하며 절규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기도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주변의 고통을 보다
고통 속에 파묻혀 지내던 어느 날, 친한 친구에게서 딸이 자폐아라는 고백을 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는데, 얘기를 안 해서 몰랐죠. 아이를 떠나보낸 것보다 아이의 고통을 매일 보는 게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죠. 저마다의 형태로 처절한 불행을 맞이한 많은 이들이 말입니다.”
이후 프란치스코 재속회에 입회한 김씨는 “더 이상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출세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며 “종신서원을 하면서 당시 수억의 연봉을 받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50대, 불편한 몸으로 시작한 신학 공부
그는 고통의 심연에서 하느님께 따져 물었다. 왜 침묵하시느냐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50대 중반에 시작한 여정이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도 힘에 부쳤지만, 그의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012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만 것이다.
“딸 잃은 충격으로 몸이 견디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반인과 비교해 기이할 정도로 진행이 더딥니다. 약 용량이 처음과 같아요. 의사도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은총이죠.”
김씨는 늦은 나이에 불편한 몸으로 프란치스코 영성학교 2년 과정을 거쳐 교리신학원 2년, 서강대학교신학대학원 3년, 박사 과정 3년, 논문 준비 4년까지 총 14년간 학생으로 지냈다. 그리고 70세인 올해 「고통에 관한 신정론적 고찰 :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정치신학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노인이 학위를 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정말 힘들었습니다. 과정만 하자고 했는데, 숙제를 끝내지 못한 거 같아 계속 했습니다. 지도교수 신부님과 주변 분들의 도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월 19일 서강대신학대학원 박사 학위 수료식에서 김영수씨가 아내(왼쪽에서 두 번째), 동료, 지도 교수 이규성 신부(왼쪽)와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김영수씨 제공
고통으로 찾은 희망
그가 논문 주제로 잡은 ‘신정론’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하느님은 왜 침묵하는가, 하느님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이다.
“제 신앙의 출발은 고통이고 신학을 시작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고통이 가장 크지요. 타인의 어떤 큰 고통보다 자신의 작은 고통이 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존재론적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학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답을 줘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제 논문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고통받는 인간에게 위로를 줄 수 있고, 그리스도의 약함이 위로를 주신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고통에서 어떻게 희망으로 갈 수 있는가. 희망의 신학, 연대의 신학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저의 물음이 학문적으로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상황이 변한 것도 아니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역설”이라며 “상황이 바뀌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점이 있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사함, 즉 내 발로 걸어서 학교에 갈 수 있고, 미사를 드릴 수 있고, 맑은 공기를 축복으로 여기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걸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호주 여행 중에 찍은 가족 사진. 김영수씨 제공
순종
하지만 김씨 부부는 아직도 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아이 기일만 되면 너무 힘듭니다. 어버이날·명절·생일 등 가족과 나누는 날이면 더 생각나요. 그저 아내와 둘이 앉아 고통을 참아내고 있습니다.”
딸을 떠나보내고 김씨는 6년 동안 매일 연미사를 넣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리 집착하고 매달려도 모든 것은 주님께서 결정하실 것임을 깨달은 후 연미사는 특별한 날에만 드리기로 했다. 위령기도와 묵주기도 15단은 지금도 매일 바치고 있다.
“저도 하느님 품으로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이제 현실에 대한 집착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시면 기쁘게는 아니겠지만,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칸이잖아요. 힘닿는 순간까지 함께 나누고, 리디아 만나러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