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Latte is Horse(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내가 그때는~”이라며 왕년에 잘나갔다고 자부하던 이들을 비꼬는 말이다.
그런데 한 평범한 골목길에 있는 이 중국집 사장은 정말 왕년에 잘나갔다. 구단의 ‘왕조 시대’ 최고 수비형 포수로 영예를 누렸던 야구선수가 우리 옆집 가게 사장님이다. 20년 전 은퇴 후 중국집 사장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최해식(마태오, 57)씨다.
그는 과거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의 주전 안방마님으로 1997년 해태의 마지막 우승을 이끌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과거를 으스대지 않고 소박한 동네 아저씨 같은 면모로 맛있는 중국음식 대접에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다. 20년 넘게 끼던 글러브 대신 웍(궁중팬)을 잡기까지의 과정을 듣기 위해 광주 운남동 소재 최씨의 중국집 ‘최고루’를 찾았다.
안방 마님이 웍을 들기까지
2000년대 초반 최씨가 은퇴 후 한 학교 야구부 코치로 일할 때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학원 스포츠에 체벌이 만연하던 시기. 그는 잘못된 관행을 끔찍이 싫어했다.
“지도자 한 분이 선수들에게 꼭 ‘농군’(야구 스타킹을 위로 올리는 것)을 강조하더라고요. 그러면 피가 안 통하고 물집도 생겨요. 그런데 그분은 선수들이 스타킹을 내리고 있으면 불러서 욕하고 체벌했죠. 저도 맞으면서 야구했지만 ‘아직도 이런 문화가 있구나’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죠.”
하지만 야구부 코치를 포기한 삶의 대가는 혹독했다. 평생 야구밖에 몰랐기에 할 줄 아는 게 전무했다. 처음 택한 것이 중국집 배달부였다. 오토바이를 타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첫날부터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다시 야구판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다. 이미 고 하일성 해설위원과도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그러다 아내가 갑자기 지인 권유로 중국집을 인수하겠다고 알려왔다. 최씨는 상경하려 했지만, 아내와 함께 중국집을 꾸려가고자 당시만 해도 거금인 권리금 1200만 원을 주고 광주에 남게 됐다.
중국집을 인수하고도 쉽지 않았다. 망해가던 가게였고, 초기 운영이 어려워 파산할 뻔하기도 했다. 직원 월급을 주려고 예물반지까지 팔았다. 최씨는 “경쟁업체가 난입해 유리창을 깨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훔쳐가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남들이라면 이 일을 접고 다시 야구판으로 돌아갈 법도 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평소 좌우명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를 끊임없이 되새겼다. 천신만고 끝에 희망이 보였다.
“20여 년 전에 광주 수완지구 공사가 한창이었어요. 현장 인부들은 눈도장을 중요시해요. 저는 그래서 그들보다 한 시간 빨리 가서 얼음물도 놔두고 겨울이면 화로와 따뜻한 차도 구비해줬죠. 그랬더니 입소문이 나서 우리 집으로만 배달을 시키더라고요.”
불과 6개월 만에 건물을 살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그의 중국집은 한때 가맹점이 17개에 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당시는 혁신적인 크로샷 프로그램을 구입, 고객 위치에 기반해 근방 가맹점에 착신하도록 시스템을 갖출 만큼 변화에도 빨랐다.
그런데 가맹점 관리가 문제였다. 주방장들이 가게를 관두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직접 주방 일을 할 줄 알아야겠다’고 여겼다. 그리고 밤마다 웍을 잡았다. 운동선수 출신의 체력과 집념 덕분이었는지 수년간 고생 끝에 자장면·짬뽕·볶음밥 등 식사부터 탕수육·깐풍기·전가복까지 쉽지 않은 중화요리의 모든 것을 익혔다.
“호텔에 있던 주방장을 지인 소개로 돈을 더 주고 데려왔어요. 그분이 처음엔 주방기술을 안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설득 끝에 배우게 됐죠. 그리고 저는 퇴근하면 잠들기 전까지 웍을 돌리고 칼질했습니다. 2년 동안 반복하니 주방장 형님이 ‘이제 하산해라’ 하더군요. 그렇게 주방 일을 익혔습니다.”
최해식(마태오)씨가 한 복지관에서 봉사활동하고 있다. 본인 제공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통상 ‘내 살 길’이 바쁘면 남을 헤아리기 어렵다. 최씨는 바쁜 와중에도 남을 봤다. 8만 가구를 짓는 수완지구 공사장에 배달 주문으로 북새통을 이룰 때였다. 재개발 구역 내에서 이주하지 못하고 있는 집에 배달을 갔다가 한 할머니가 자장면을 먹지 않고 손주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사업에만 매진하던 그가 무언가 크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사소한 것이라도 나누자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한 마을 노인정에 자장면 50그릇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눔의 규모는 점차 확장돼 노인복지관·장애인복지관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매달 한 번씩 자장면 500인분을 만들어 소외된 이웃들에게 대접했다. 최씨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 석 달에 한 번씩 운남동본당 소년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자장면을 대접하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봉사활동에 나설 때면) 내가 남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자주 느껴요. 꼭 거액을 기부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이 앉아서 밥 한 끼 먹는 것도 좋죠. 이런 나눔은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저는 한 번 웍질했을 뿐인데 남들이 맛있게 먹잖아요? 그러면 날아갈 것만 같아요. 내가 그들을 기쁘게 해줬구나!”
베푸는 삶에 헌신하게 됐지만 생색내진 않았다. 광주시에서 받은 표창도 가게 한구석에 놓여있을 뿐이다. 최씨는 “수백 명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큰 행사라도 절대 현수막을 걸지 못하게 하고 인사만 하고 나온다”고 했다.
세례와 새로운 형제를 맞이하기까지
최씨가 ‘마태오’로 세례받은 건 2023년 9월. 1987년 당시 애인이었던 아내는 함세웅(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최씨는 이후 30여 년간 세례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권사 직분에 오를 만큼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차마 가톨릭 세례를 받겠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교리반을 세 차례나 들어갔다 나왔다.
가톨릭에 마음의 부채를 갖고 있던 그가 세례를 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재작년 초. ‘멘토’로 여기던 이의 부고 때였다. 최씨는 “장례 후 형수님이 찾아오시더니 세례받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면서 “그 순간 세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새벽 교리반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운남동본당에서 ‘최고로’ 열심한 신자다. 레지오 마리애와 대건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중이다. 최씨는 “ 남을 위해 빌어주라는 예수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며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고 남들이 저를 볼 때 영혼이 맑은 사람 같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
최씨의 중국집은 그가 세례받은 뒤 운남동본당 ‘사랑방’이 됐을 정도로 본당 신자들과 한 식구처럼 의지하며 지낸다. 수요일마다 가게 문을 닫는 이유도 화요일 레지오 회합 후 본당 형제들과 식당에서 오순도순 나머지 시간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동료 레지오 단원 최영호(요셉)씨는 “티를 내지 않지만 본당 활동을 참 열심히 하고 많은 분이 좋아한다”며 “인간적으로 따뜻한 친구란 것을 느끼며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씨의 꿈은 세계 여러 곳 신앙이 깃든 성지순례하기와 나누는 삶이다. “노후에는 바티칸이나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성지를 가보고 싶고요. 세계 곳곳의 성지를 다녀오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죽기 전까지 열심히 살다가 가고 싶어요. 제가 술·음식·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들과 나누고 더불어 살며 이웃과 계속 함께하는 게 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