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훈장님과 아이들’, 랜턴 슬라이드, 1911년 3월, 서울 약명학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뮈텔 주교, 선교 베네딕도회 한국 파견 요청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고 했다. 수도 생활의 목표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수도 생활만 이러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인생의 궁극 목표가 하느님을 찾는 것일 것이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선 성경뿐 아니라 세상의 학문도 중요하다. 학문은 글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을 제시하고, 세상 이치를 올바로 깨닫는 지성을 형성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회는 그리스도교 문화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책’으로 상징되는 주님 말씀을 가르치는 데 늘 선도 역할을 해왔다. 선교 베네딕도회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수도자들이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남자 수도회로서는 처음 1909년 한국에 진출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911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문명화’를 내걸고 우리 민족을 무시하던 일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직관했다. 그는 세속 이익과 경제 수탈만을 추구하던 일제의 물질주의가 한국민의 존귀한 이상을 말살하고 말 것이라 우려했다. 특히 그는 일본말과 일본 정신을 가르치는 식민 교육을 지켜보면서 한국민의 드높은 민족 의식과 고유 풍습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지난 2년 동안의 변화는 예상보다 훨씬 급격한 것이었다. 한국은 정말 일본화되었다. 일본은 학교 관영화 의지를 천명했고, 한국인들의 뜨거운 교육열은 갑작스러운 폭우로 차갑게 식어 버렸다. (?) 미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은 그래서 흐려졌을 수도 있다. 학교 설립의 당면한 필요성은 그리 중시되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를 열고 수업을 하고 싶어도, 그 간절한 소망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더 심각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 가뜩이나 열악한 상황인데, 일본 정부의 태도가 어려움을 배가시켰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고등교육이 시행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설립한 학교는 일본의 계획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계획은 한국의 완전한 병합이다. 한국인들은 학교를 매개로 자유를 쟁취하려 했다. 이런 정신은 병합 후에도 학교에 계속 살아있다. 학교는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한때 중국에 저항하는 정신적 보루였던 한국 학교들이, 지금은 항일 세력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일본 당국은 짐작하는데, 사실상 그리 틀린 짐작은 아니다. (?) 그래도 지속적 국민 교육은 필요하다. 한국 땅 가는 곳마다 일본인들이 장악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판국에서 선교회가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사회 활동에서 배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를 지향하는 백성의 원의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소학교와 사범학교가 필수 불가결하다. 자, 힘을 내서 사업에 매진하자!”(「고요한 아침의 나라」 181~184쪽)
<사진 2> ‘벌받는 아이’, 랜턴 슬라이드, 1911년 3월, 서울 약명학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약현본당 서당식 교육기관인 ‘약명학교’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약현(현 중림동약현)본당 초대 주임 두세 신부가 운영하는 서당식 교육기관인 ‘약명학교’(藥明學校)를 방문했다.<사진 1> 1906년에 설립된 약명학교는 남자 아동을 대상으로 가톨릭 교리는 물론 국문과 한문·산술 등을 가르쳤다. 오늘날 초등학교 역할을 한 것이다.
국문 곧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있어 민족 문화 자각과 함께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이었다. 망건을 쓰고 두루마리를 입은 채 꼿꼿하게 아동들 뒤에 서 있는 훈장의 모습이 비장하다. 살아있는 그의 눈빛은 우리말과 글을 반드시 지켜내겠노라는 사명감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 시기 우리 지식인들은 우리글과 말, 우리 역사 등 민족 문화를 보존해 민족 정신을 유지하면 빼앗긴 국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책을 읽는 아이들의 표정도 사뭇 진지하다. 맨 오른편에 앉아 있는 아이의 천진하고 여유로운 미소가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싱그럽다.
약명학교 남학생들은 대부분 약현본당 교우들이었다. 이들의 가정은 곤궁했다. “교사(校舍)도 일본인이나 개신교에서 경영하는 학교에 비하면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정도로 그 시설면에 있어서 미비하여 마치 카타콤바 시대를 연상케 하는 아주 불편하고 낡은 한옥을 사용하고 있었다.”(「중림동약현본당 100년사」 55쪽)
그러나 약명학교 학생들을 본 베버 총아빠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고,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예찬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34쪽)
<사진 3> ‘서당’, 랜턴 슬라이드, 1911년 3월,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일제, ‘서당 규칙’ 공포해 민족 교육 차단
한 아이가 종아리를 걷고 훈장에게 회초리를 맞고 있다.<사진 2> 매로 아이를 훈육하는 훈장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눈을 피한 채 무심히 회초리를 들고 있다. 문지방 뒤편의 동문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매 맞는 아이를 쳐다본다. 아마도 수업 중에 떠들었거나 과제를 제대로 익혀오지 못했을 터이다. 지금은 체벌을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는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체벌이 일상이었다. 사랑과 매는 역설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 학창시절 추억이 떠오르는 심리는 뭘까!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서당’이란 제목의 랜턴 슬라이드 유리건판이 있다.<사진 3> 한옥 마루 모양을 보아 약명학교가 아닌 다른 서당의 모습이다. 나이 차가 많은 동문이 마당에 줄지어 나란히 앉아 한자를 익히고 있다. 서당 학생들 뒤에는 훈장과 보조교사 격인 접장이 서 있다. 서당의 기본 교육은 책 읽기와 글쓰기다. 하루 독서량을 배워 시험에 통과해야 다음 진도가 나간다.
서당 교육 역시 일제 강점기에 들어 큰 변화를 겪는다. 조선총독부는 서당 교육이 민족 정신을 드높이는 온상이라 여겨 탄압했다. 대표적인 것이 1918년 공포한 ‘서당 규칙’이다. 이 법령으로 일제는 서당에서 행한 민족 교육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일제는 서당을 강력히 단속함으로써 90가 넘는 학령 아동을 문맹으로 묶어둘 수 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기초 교육 기관인 서당을 탄압하는 것을 목격하고 결기를 다진 베버 총아빠스의 다짐을 다시 한 번 새기자. “그래도 지속적 국민 교육은 필요하다. 한국 땅 가는 곳마다 일본인들이 장악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판국에서 선교회가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 자, 힘을 내서 사업에 매진하자!”
교육, 그것도 그리스도교 교육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께 찾아가는 길을 여는 무한한 쟁기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