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성모님의 달 5월에 써두었던 묵상으로 단상을 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지난 두 달간 저는 병중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동고동락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이 글은 그 여정에서 길어올린 조용한 고백이며, 숨결로 드린 기도의 기록입니다.
기도는 생존입니다. 습관이기보다 간절함이고, 호흡이며, 하루를 여는 문입니다. 고요한 새벽, 저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십자성호를 그립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손끝은 가만히 있지만, 상상 속 그 손짓이 제 하루의 첫 문을 엽니다. 아침이 밝으면 삼종기도를 바칩니다. 그저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내면의 준비이고 숨결을 기도로 엮어내는 살아있는 실천입니다.
5월은 성모님의 달이지요. 본당마다 성모의 밤이 열리고, 아이들은 꽃을 바칩니다. 하지만 저의 성모 성월은 조용한 한켠에서 펼쳐집니다. 이 시간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성모님과 맺는 깊은 관계를 새롭게 다지는 은총의 때입니다. 묵주기도는 제게 신앙의 뿌리이자 날마다 피어나는 부활의 약속입니다. 성모송이 반복될수록 제 안의 그리스도 신비는 깊어지고, 어느새 눈물이 흐릅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닌 회심의 눈물이며, 희망으로 피어나는 믿음의 이슬입니다. 기도 속에서 떠오르는 예수님의 얼굴, 그분의 상처는 제 상처와 포개지고, 그 순간 제 고통은 예수님, 성모님과 함께 짊어지는 십자가가 됩니다.
묵주기도가 얼마나 깊고 실존적인 여정인지, 날마다 다시금 깨닫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중보를 신뢰하며, 저는 어머니의 모성적 사랑에 자신을 맡깁니다. 제 몸은 기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제게 남아있는 것은 단 네 개의 손가락, 작은 잔존 근육뿐입니다. 묵주 알을 굴릴 수는 없지만, 손바닥이나 손등에 묵주를 올려놓고 마음으로 하나하나 더듬듯 기도합니다. 저는 묵주를 ‘잡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대어’ 기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세상은 멈춘 듯 고요하고, 하느님께서 가까이서 제 숨결에 귀 기울이시는 듯 느껴집니다.
얼마 전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한 형제가 “형제님의 글을 조용히 읽어왔어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다리 위에서 이미 만나있었음을. 고통은 사람을 갈라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사랑의 실로 우리 삶을 엮고, 그 실은 성모님 손길을 따라 기도의 고리로 이어집니다. 묵주기도는 나만의 기도가 아닙니다. 연대의 기도이고, 위로의 노래입니다.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찬송입니다.
7월 5일이면 한 살이 되는 조카 베로니카는 눈빛에 별을 달고 기어와 묵주를 양손에 들고 신나게 흔듭니다. 그 모습은 마치 성모님을 향한 작은 인사처럼 제 마음에 따뜻한 웃음을 안깁니다. 아이의 세례명을 제가 지어주었고, 유아세례도 받게 했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주님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의지할 수 있는 영혼이 되기를, 기도의 의미를 품은 삶으로 자라나기를 날마다 기도합니다. 저는 아픈 이들의 앓음을 들으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성모님 전구로 모든 가정에,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친교와 웃음 넘치는 포도주 같은 기쁨을 주소서.”
묵주를 쥔 손은 작고 연약하지만, 기도는 크고 단단합니다. 잃어가는 것을 애도하기보다, 더 사랑하기. 이것이 저의 기도이며, 매일 새롭게 해주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혹시 지금 견디기 어려운 밤을 지나고 있나요? 숨이 벅찬 하루 속에 놓여있진 않나요? 그렇다면 묵주를 쥐어보세요. 그 작은 알 하나하나가 당신의 고통을 하느님께 이끄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되어줄 것입니다.
성모님은 기도 속에 늘 함께 계십니다. 눈물 속에서 안아주시고, 침묵 속에서 함께 울어주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성모님께 이 노래를 봉헌하며, 감미로운 포도주가 우리의 삶에 깃들기를. 아멘.
신선비(미카엘)씨는 서울에 거주하는 천주교 신자. 근육병으로 누운 채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남은 네 개의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묵주를 쥐고 하루를 살아낸다. 숨과 고통, 기억과 신앙을 꿰어 기도의 언어로 세상과 조용히 연결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