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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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가장 가까운 정의

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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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편에 서는 드라마.” MBC 드라마 ‘노무사 노무진’은 억울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특히 유령이 된 노동자가 스스로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독특한 설정은 노동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처럼 노동자의 고통을 이야기로 엮어낸 이 작품의 연출자 임순례 감독이, 정작 자신이 이사장을 지낸 시민단체 ‘카라’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고 노조 간부를 징계하는 데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현실에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오히려 짓밟은 이가, 드라마로는 그 고통을 서사화한다는 이율배반에 많은 이가 분노했다. 그러나 이 일은 단지 한 개인의 모순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진보적이고 윤리적인 이상을 내세우는 공동체일수록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노동문제를 외면하고, 실무자들의 노동을 간과하며, 그들의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폄하하는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하는 가치와 현실에서의 행동 사이 간극을 직면하기는 이처럼 쉽지 않다.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여긴 일반 직장이 아니다”라는 말, 그리고 임순례 감독이 “활동가들이 왜 ‘카라’에 들어왔는지 근본적 회의가 든다. 돈을 더 받길 원하면 영리기업에 가시면 된다”라며 카라의 활동가들에게 던진 말들은 왠지 너무 익숙하다.

교회 안에서 자주 “자매님”이라 불리는 이들의 이름없는 노동은 너무 쉽게 ‘봉사’와 ‘헌신’이라는 말로 환원되고 만다. 교회 기관 안에서 성직주의가 유독 강고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직원들을 ‘동료’가 아닌 ‘조력자’로 간주하는 관성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는 교회 내 노동을 협력과 연대로 보지 않고 위계 속 질서로 이해하는 낡은 노동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톨릭교회는 오랫동안 노동자들의 권익과 인간 노동의 존엄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해왔다.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 이후 교회는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는 메시지를 줄곧 강조해왔다. 최근 즉위한 레오 14세 교황 역시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노동 조건에 주목하며,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가톨릭교회는 이처럼 노동자의 존엄에 관해 누구보다 풍부한 원칙과 언어를 쌓아온 공동체다. 그러나 그 말들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 역시 물어야 한다. 한국 교회에 노동조합이 설립된 교구나 교회 기관은 과연 얼마나 될까?

“교회는 다른 직장과는 다르다”라는 말에 누구보다 동의하지만, 이는 교회 안의 노동이 단순한 고용관계를 넘어 하느님 나라를 함께 일구는 공동의 사명을 향한 협력이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노동자’라는 표현이 단지 평신도 직원들을 근로계약 관계 안에만 가두는 말로 머무는 것도 경계하고 싶다.

‘노동자’라는 호명이 필요한 이유는 오히려 이 협력의 실질적 조건이 존중받고 있는지를 묻기 위함이다. 그리고 계약을 넘어선 공동체적 연대와 존엄의 실현 위에 비로소 우리는 ‘정의’를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공동체의 윤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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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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