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방 바르(Var) 지역의 울창한 계곡 속에는 12세기경 건축된 르 도로네(Le Thoronet)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 입구의 성물방에 들른 나는 이 수도원의 복도를 찍은 사진 액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성물 하나 못 사고 나는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오래 광야를 떠돌다가 아버지 집에 돌아오면 그런 느낌일까, 나는 성당을 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아무 의자에나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르 뚜르네 수도원을 짓기 전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이 수도원에 들렀다가 예정에도 없이 한 달을 더 머물며 책을 썼다고 했다. ‘진실의 건축’, 나는 그때 건축가의 영성이 콘크리트나 돌 혹은 나무에 스며들어,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영성을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처음 체험했다.
그리고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많은 잘못들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설명을 다 듣지 못하고 일행과 떨어져 홀로 울었다. 즐거운 스페인 여행 중 왜 갑자기 내 잘못들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성당의 정식 이름이 ‘Temple Expatori De La Sagrada Famillia’, 즉 ‘성가정의 참회의 성당’이었다. 성인 품에 오를 가우디의 영성이 내게 전해져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은 왜관의 성 베네딕도 문화영성센터. 이 건물에서 머물면 하염없는 평화가 온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어떤 곳에든 여행을 가면 아침마다 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제 집으로 갔어야 했어“라고. 그런데 이곳에서는 생각하곤 한다. ”이 고요에 이 평화에 하루 더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해 봤는데, 이건 건축가 승효상의 영성이었다. 그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이 건물을 짓는 이 년여 동안 거의 수도원에 머무르며 다섯 번의 매일 시간 전례 기도에 모두 참례했다. 그의 가족은 오래된 개신교 신자들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북한에서 남으로 이주하여 가난을 견딘 것으로 유명했다. 나는 가끔 그에게 100세에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의 신앙에 대해 듣곤 했는데, 그 역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었다 .
어쨌든 그런 건축가 승효상의 강연을 들으러 하동에서 남양 성모 성지까지 나는 먼 길을 떠났다. 나는 십여 년 전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정말 시골 냄새가 풀풀 풍기는 논두렁 사이에 서 있던 가난하고 작은 성당. 그런데 십여 년 만에 방문한 그곳은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이상각 신부님은 미사에서 강론을 한 시간 넘게 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묵주기도를 하루에 백단 이상을 한다는 말을 계속했다. 고상한(?) 신자였던 내가 그런 물량에 질려버렸던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는 약간 광신의 냄새도 난다며 투덜거렸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그 남양 성모 성지를 오르면서 나는 다윗 같은 한 인간을 느꼈다. 가난한 그 사제는 묵주 딱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대성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래서 울고 있었다. 이런 경험 또한 처음이었는데, 이번에는 대성당을 건축한 유명한 건축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건물을 지은 건축주, 이상각 신부님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묵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어차피 기도해도 하느님 맘대로 하실 거잖아요” 반항하며, 이즈음 나는 우울함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또 기도를 시작하는가. 그러니 어쩌면 신앙은 횃불과 같은가 보다. 그 곁에 가면 싫어도 기어이 불이 옮겨붙고 마는.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