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이전 세대보다 자연재해, 궁핍과 기아, 갖가지 질병, 미신, 폭군들의 압정과 같은 많은 굴레에서 벗어나 생활하고 있다. 최근 등장한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과학과 이에 함께 급성장한 교통과 통신의 기술은 인간을 제약해 왔던 시간과 공간의 장벽마저도 허물어뜨렸다. 이처럼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편리한 수단들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향유해야 할 인간 본연의 천부적 권리, 즉 ‘자유권’의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역사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참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의 등장과 이에 대한 비판
결정주의를 거슬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J. P. Sartre)와 같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투신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주목할 만한 성찰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구속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결정주의’를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인간이란 자유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더 높은 힘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인정하려는 입장은 많은 비판에 부딪혔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이 세계와 사회와 역사에 의존해 있는 상태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인간은 또한 외부적인 요인들뿐 아니라 자신의 열정이나 심리적 중압감 등으로부터도 제약을 받는다. 실제로 자신이 정말 자유롭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보이고 그들 중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더욱 적어 보인다.
자유 개념의 다양성에 대한 성찰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이를 추구할 때 ‘불안’이나 ‘고독’을 느끼게 되고 때로 그 심리적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인간의 자유는 단일한 성격을 지니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을 향한 의지의 경향 자체는 필연적임(「진리론」 14,2)을 인정하면서도, 의지가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는 경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실행(Exercitii)의 자유는 의지가 자신의 의지 행위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 곧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종별화(種別化, Specificationis)의 자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반대(Contrarietatis)의 자유는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진리론」 22,6)
‘실행의 자유’는 전적으로 의지의 재량에 달려 있지만, ‘종별화의 자유’는 권력, 명예, 재화 등의 가치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외적으로 방해받지 않을 때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단계에서 프롬(E. Fromm)이 ‘~로부터의 자유’(Liberty from~)라고 부른 ‘소극적 자유’, 즉 관계·강제·구속·방해 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을 위한 자유’(Liberty for~)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는 ‘반대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의 측면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도 자유가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현대인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고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고, 일부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듯하다. 외적인 성공에만 집착해서 이기주의와 향락주의가 팽배하고 희생, 절제, 정의, 이웃에 대한 배려 등을 경멸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한 애순과 관식의 사랑이 전 세계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었다. 양친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이 청춘 남녀가 단지 부모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부산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은 원했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단순한 벗어남, 혹은 도피만으로는 개인의 독립이 아니라 당사자와 양친들에게 더 큰 속박을 만들었을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순수한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함을 뚜렷이 자각하고 살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결정을 통해서 엄청난 어려움들이 생겨났지만, 애순과 관식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새롭게 맺어진 관계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확신에 찬 의식과 행동이 자신들의 결정에 반대했던 이들도 설득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양한 가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가치 자체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이것이 좋으니까 내가 한다’라고 말해야지 ‘내가 하니까 좋은 것이다’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며 그 가치의 기준은 행위 주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만약 인간의 의지가 나쁜 것을 결정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자유의 결함을 의미한다. 비도덕적인 결정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 자유의 모습을 지녔지만, 자유도 아니며 자유의 한 부분도 아니다. 많은 현대인이 빠져드는 도박, 마약 등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중독이라는 부자유를 남길 뿐이다. 인간은 항상 선한 대상과 악한 대상 중, 자신의 자유를 성숙 또는 억압하는 방향 중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도덕적인 욕구가 의지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면, 의지가 확고히 선을 향하고 있을수록 그 자유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외적 환경이나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인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섭리가 우주 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면, 과연 그 안에는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있을까?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해 다음 호에서 진지하게 성찰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