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의 끝은 불행히도 죽음이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신앙을 살아가는 일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지난한 신앙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앙을 살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게 우리이지만 실은 세상에서 실패한 삶이 순교였고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인지하고 추앙하는 우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묵시록 11장의 두 증인의 죽음은 신앙의 결과가 참혹한 실패라는 ‘사실’에 대한 복기이자 해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은 땅의 주민들을 기쁘게 하는 대상이 된다.(묵시 11,10 참조) 순교나 신앙의 증거는 세상 안에서의 실패나 참혹한 결과를 비껴가지 않는다. 두 증인은 정확히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은 세상의 조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죽음은 악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가 아니다. 묵시록 11장의 동사 시제를 살펴보면 그렇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싸워 이기는 대목에 사용된 동사는 미래형이다. 악의 승리는 여전히 요원하다. 우리는 묵시록 12장(1~8절)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또한 만나게 된다.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권한이 주어진 짐승이지만 현실적인 전쟁이나 다툼은 묘사되지 않는다. 악의 존재는 서술하되, 그 권한이나 능력의 실행은 철저히 제한하는 묵시록의 서술 방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동사는 ‘현재형’이다. 두 증인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캐릭터는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 말하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다른 표현으론 ‘땅의 주민들’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지금’은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해석(기뻐하고 즐거워하는)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다. 악의 세력에 의한 두 증인의 실패가 아니라 두 증인의 주검에 대한 해석과 읽기가 우리 이야기의 현재다.
악의 세력은 두렵고 짐승의 힘은 대단한듯 하나 미래에 일어날, 그래서 지금은 공허하고 허무한 힘일 뿐이다. 지금의 시간은, 증언하는 일이 실은 죽는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묻는 시간이다.
우리 이야기의 공간적 구성 역시 그러하다. 두 증인의 주검은 ‘큰 도성의 한 길’, ‘소돔과 고모라, 혹은 이집트’라고도 하는 도성에 버려져 있다.(묵시 11,8 참조) 이 도성을 해석하는 스펙트럼은 ‘영적인 눈’이다.(이 도성은 ‘영적으로(πνευματικ??) 불린다’라고 본문은 말한다) 현실의 공간을 영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미 사라진 저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까지 죄다 불러와 현실의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투사하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심판과 단죄의 공간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공간’이라는 서술을 덧붙인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 안에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것. 악함의 한가운데 두 증인의 주검이 있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자리라는 역설이 묵시록이 꾸며놓는 시·공간의 묘미다. 증인들의 주검은 주님이 함께하는 구원의 공간을 가리키는 지시체다.
묵시록 서사의 전형적 특징이 매번 이렇다. 선악의 완전한 구분을 이야기하는 얄팍한 이원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고 기뻐하던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은 묵시록 5장의 어린양이 속량한 사람들이기도 하다.(묵시 5,9 참조) 우리 모두는 선하기도 하고 동시에 악하기도 하다. 선악을 무 자르듯 딱 갈라놓고 생각할 수 있는 편리함은 이 세상에 애시당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땅의 주민들이 두 증인의 주검을 두고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두 증인이 선포한 예언의 말들이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이고 두 증인의 죽음으로 그 괴롭힘이 사라졌을 것이라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리라.(묵시 11,10 참조) 그러나 이 기쁨은 단지 사흘 반의 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묵시 11,11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그리고 삼 년과 반 년의 시간들과 의미를 같이 하는 ‘사흘 반’의 시간은 완전 수 ‘7’이 반토막 난, 그리하여 미완의 시간으로 남는다. 땅의 주민들이 나누는 기쁨은 한시적일 뿐이다. 우리 이야기의 읽기는 한시적인 기쁨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세심히 살펴보는 데 있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에서
구원의 완성 이뤄지는 역설
‘두 증인’ 죽었다가 살아나며
하느님 향한 끝없는 여정 증언
사흘 반이 지나고 두 증인은 제 발로 일어선다. 주검이 생명을 얻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주석학자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재건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에제키엘서 37장의 ‘마른 뼈’를 떠올린다. 마른 뼈가 힘줄과 살이 붙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케 하리라는 희망을 노래한다. 묵시록 11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땅에서의 부흥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가는 두 증인의 모습을 기록하기 때문이다.(묵시 11,12 참조) 전통적인 주석학자들은 하늘을 오르는 두 증인이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2열왕 2,11 참조)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베드로와 바오로라고 이해하는 전통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두 증인을 역사의 어느 인물로 고정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이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드리는 지표와 모범이 된 것이 역사 속 한두 명의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두 증인이 하늘로 오르는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도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고 칠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묵시 11,13 참조)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천재지변과 땅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서술은 ‘남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회개의 문학적 장치다. 두 증인의 죽음으로 시작한 세상 사람들의 한시적 기쁨은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 향하고 있다.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나아가 무수히 많은 불행과 고통과 비참함이 우리 생에 닥치더라도 신앙인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의 한 대목으로 이해한다는 다소 투박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가 묵시록 11장이 전하는 두 증인의 이야기다. 증언의 끝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결판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비로소 생명의 가치를, 그 본령이신 하느님을 알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또 죽어간다, 살기 위해서!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