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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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교육 통해 일제 강점기 국권 회복·민족 의식 고취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6. 여학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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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에게 바느질과 수예를 배우고 있는 여학생들, 1925, 대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교회, 종교 교육과 함께 근대 교육 시행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주요 당면 과제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이었다. 교육은 우리 민족 국권 회복 운동의 근원이었고, 한국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이 문제를 깊이 인식했다.

한국 교회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애주애인’(愛主愛人) 같은 복음 내용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워 종교 교육과 함께 근대 교육을 시행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 이념과 목표는 서양 학문의 수용으로 참된 개화를 이루어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당시 한국 교회가 발행하던 ‘경향신문’은 1907년 12월 27일 자 논설을 통해 교육을 통한 개화만이 열강 침략에 맞서 이길 수 있고,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개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경향신문은 또 국권 회복을 위해 애국과 자주 정신·민족 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교육을 강조했다.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24일 자 논설에서 경향신문은 자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외세 의존 경향을 끊어버릴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스스로 힘과 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교회는 124개 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1910년에 근접할수록 천주교회에서 설립한 여러 사립학교에서는 항일 구국 사상의 영향으로 교과 과정에 항일적 요소를 강하게 반영하여, 독립 의식·민족 의식·항일 의식이 담긴 민간인 편찬의 교과서를 교육 교재로 사용하였다. 더 나아가 국권 회복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 훈련으로 운동회가 자주 개최되곤 하였다. 이때에는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 만세를 외쳤으며, 운동회가 끝난 후에는 연설회를 개최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 천주교 학교에서도 체육에 대해 강조하였는데, 이는 일본 사립학교와 마찬가지로 피압박 민족의 울분과 사회적 불만을 분출하고 민족 자강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719쪽, 김성희,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 활동-1882~1910년을 중심으로’)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수예를 하는 여학생들, 1925, 대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원,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첫 여학교 설립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여성 교육을 시행한 곳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다. 1888년 7월 22일 한국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899년 8월 개항지 인천에 여학교를 설립했다. 30여 명의 여학생에게 한글·한문·산술·지리·수예와 가톨릭 기도문·교리를 가르쳤다. 이후 서울 종현·약현성당, 인천 제물포성당, 평양 관후리 성당, 평남 진남포성당, 황해도 매화동성당, 제주성당 등에서 여학생 교육을 맡았다. 이처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여성 교육을 도맡아 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사진 1>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은 주로 가정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과목들, 곧 바느질·청소·세탁·육아법·자수 등을 가르쳤다. 이들의 교육 목표는 현모양처로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 여성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1911년 2월 말 처음 방한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지난 세기말까지 중국이 한국에 구사한 봉건적 방식과도 다르고 과거 한때 일본이 취한 한반도 정책과도 다르게, 일본은 지금 한국을 병합하고 피정복 민족을 동화시켜 그들의 조력으로 동양의 지도적 강국이 되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북반부에서 일본이 펼치는 구애의 달콤함보다는 병합으로 한국인들이 입은 상처가 더 크고 아프지만, 일본은 모든 난관 특히 재정난을 극복하고 목적을 이룰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53~54쪽)

그래서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인들의 인재 양성 교육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봤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학생들과 학교·수업 장면을 촬영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8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종현본당 여학교를 방문했다.<사진 2>

“수녀원장은 우리를 아이들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었다. 한국 아이들에게 이런 일은 전혀 낯설지 않다. 여성에게는 빨래 같은 가사 노동이 끝도 없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12살 소녀 34명이 긴 탁자 주위에 꿇어앉거나 쪼그리고 앉거나 의자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아 있다. 소녀들은 저마다 수예보를 하나씩 들고 재빠르고 능숙하게 바늘을 다루며 수를 놓았다. 이렇게 만든 수예품은 미국 부인들이 즐겨 산다고 했다. (?) 아이들에게는 수줍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가혹한 노예적 운명이 새겨진 표정들만 남아 있다. 외교인의 나라가 으레 그렇듯이, 한국 여성들도 수백 년 동안 종의 멍에를 지고 살았다. 어머니는 딸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운명을 대물림한다. 생은,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는 고통으로 점철된다. 쉽게 물러날 고통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숭고함만이 비로소 그 어두운 그늘에 빛을 던져 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9~130쪽)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가명학교 여학생들, 1911. 3. 8, 서울 약현,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약현본당 운영 ‘가명학교’ 방문

베버 총아빠스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는 보육원과 여학교에 이어 약현본당이 운영하는 가명학교를 방문했다.<사진 3>

“성당에서 조금 내려오면 평탄 작업을 한 부지 위에 여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한국인 수녀 둘이 운영한다. 교실은 작고 초라했다. 질박한 걸상들을 보니 그런 느낌이 더했다. 하지만 부지를 확장하고 시설을 개선할 경비를 어디서 끌어온단 말인가? 수녀들의 헌신적 사랑과 기를 쓰고 공부와 수작업에 매달리는 착한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 이곳에는 사랑이 있다. 수녀들은 그 비좁은 교실에서 제 나라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는다. 그 작은 초가는 두 선생 수녀가 사는 수녀원이었다. 그들도 한때는 가족과 함께 자개장으로 치장한 부잣집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값진 금은 장신구일랑 자매들에게 넘기고 빈민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청빈을 택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32~134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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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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