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밀 품종 고소밀, 김제서 첫 수확
향후 재배단지 확대, 생산량 늘릴 계획
신앙·생명·우리농 지키는 마중물 역할
지난 11일 전북 김제. 이곳은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의 중심인 김제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차에서 내리자 보이는 드넓은 지평선에는 최근 모판에서 옮겨진 벼들로 가득 차 녹색빛 볏잎의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이 들판은 이삭을 맺은 밀로 누런빛이 가득했던 곳이다. 최근 제병(성체로 축성되는 빵)용 우리밀 품종 ‘고소밀’이 이곳 김제 전용 재배단지에서 첫 수확됐다.
20일은 1995년 주교회의 추계정기총회 이후 제정된 농민 주일이 30주년을 맞는 날이다. 우리 농산물의 현주소와 고소밀을 생산하게 된 이유를 듣고자 전북 김제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 제분공장을 찾았다.
수확한 밀알의 모습.
밀에서 밀가루가 되기까지
현재 수확을 마친 밀들은 논밭 옆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대표 심상준) 제분공장에서 국수와 제병 등 제품으로 재탄생되기 위해 제분 및 가공 공정 절차를 밟고 있었다. 공장 시설 내 근로자들은 하루빨리 밀을 밥상과 미사 제단에 올리기 위해 분주했다.
1톤 분량의 통밀 포대를 실은 지게차 기사는 시설 탱크로 하역하는 데 한 알의 밀도 바닥에 흘리지 않기 위해 연신 구슬땀을 흘리며 신중하게 기어를 조작했다. 하역 후 공장 내부로 들어서자 제분 기계는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쉼없이 돌아갔다. 내부는 에어컨 냉방이 있어도 기계가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하역과 정선(불순물 분리), 가수(밀에 물을 가해 제분에 적합한 상태로 만드는 것), 제분을 마치고서야 마침내 우리가 아는 밀가루가 탄생한다.
고소밀 재배단지는 약 5헥타르(5만㎡)에 이른다. 보통 1헥타르당 생산되는 밀은 5톤에 달한다. 올해 시범사업으로 우리농과 계약한 재배단지에서 수확한 고소밀의 양은 8톤가량 된다. 심상준(아모스) 대표는 “향후 재배단지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해 수확한 밀은 우리농 공장에서 제분, 가르멜여자수도원에 보급돼 제병으로 만들어져 각 본당에 공급될 예정이다. 다만 1년 기준 제병용으로 쓰이는 우리밀은 200톤 이상으로 추정돼 아직 제병용 밀을 전량 고소밀로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신앙과 생명, 우리 농업의 가치를 지키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모인다.
고소밀을 이용해 가르멜여자수도원에서 만든 제병.
제병에 적합한 밀 찾아라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시작된 건 지난 1989년. 이때 경남 고성에 밀을 파종하고 1991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발족과 우리밀 생산이 시작됐다. 한국 교회에는 제병 제작도 우리밀로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91년 최초 생산된 밀을 서울 소재 가르멜여자수도원에 처음 제병용 밀을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밀로 제병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존 우리밀은 제병으로 만들기엔 다소 어려운 성질을 띠고 있다. 심 대표는 “우리밀 품종들이 강력분이나 중력분이 많아 점성이 높다”며 “그동안 수분과 점성이 높은 밀을 갖고 제병을 만들었는데, 맞지 않는 밀로 제병을 제작하다 보니 수녀님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했다. 심 대표는 제병 제작 중 판에 밀이 달라붙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던 중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이 기존보다 제병을 만들기에 용이한 점성과 회분(태웠을 때 남는 재의 양)이 적은 밀을 발견했다. 심 대표는 “이 밀을 수소문해서 구매에 성공했고 제분해 수녀원에 가져다 드렸더니 판에 제병이 달라붙지 않는다고 훨씬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고소밀 전문 재배단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지금에 이르게 됐다”며 “고소밀로 제병을 만들면서 기존 밀가루보다 체감수율이 80 이상 높아졌다”고 전했다.
우리밀 생산의 의미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32. 그마저도 쌀을 제외하면 자급률이 1~2 남짓한 곡물이 즐비하다. 밀도 그 중 하나다. 지난해 밀 자급률은 2에 그쳤다. 우리농은 해마다 우리밀을 1000톤 이상 수매해 대형유통사와 쿠팡 등 온라인 쇼핑몰에도 유통했다. 그러는 사이 밀산업육성법이 2019년 제정되며 제1차 밀산업 육성 기본계획(2020~2025)이 추진됐지만, 목표치 10를 달성하기엔 역부족이다.
심 대표는 우리밀을 생산해야 하는 이유로 ‘기후위기 대응’을 꼽았다. 심 대표는 “수입밀 대신 우리밀을 소비하게 되면 운송 거리가 짧아져서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운송거리는 전북 김제에서 서울까지 300㎞다. 호주에서 우리나라까지는 약 7000㎞, 미국 서부에서는 1만㎞가 족히 넘는다. 더불어 밀밭 1㏊당 100㎏의 미세먼지가 경감되고 8만㏊당 산소 23만 톤이 방출된다는 추산도 있다.
심 대표는 “환경이 보존된다는 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활기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라며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우리밀로 제병을 만들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소중함을 더 깨달을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기후위기, 체감합니다”
밀은 대표적 동계 작물이다. 11월에 파종하고 이듬해 5, 6월 즈음 추수한다. 이러한 성격상 밀과 벼를 시기만 달리해 재배하는 이모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밀 농사에 빨간불이 켜졌다. 기후위기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예측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심 대표는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이삭이 차올랐는데 하루아침에 기온이 급강하해 수확을 제대로 못해 곡물이 상한 경우가 많다”며 “일기가 날마다 급변하다 보니 농사를 30, 40년 지어온 농민들도 감을 못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뭄이 지속되다 수확할 때쯤 장마도 아닌데 비가 심하게 와 ‘수발아’(수확 전 싹이 트는 현상)로 인해 상품성이 뚝 떨어진다. 병충해에도 취약해진다”고 토로했다.
더불어 이모작이 가능한 지역이 확대되고 있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자라는 벼는 금강 이남 지방에서 주로 수확된다. 하지만 점차 이모작 지역이 확대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심 대표는 “지금 충청도 중 금강 이북지역에서도 이모작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밀을 늦게 수확하더라도 서리가 늦게 내리니 벼를 연말에도 추수할 수 있어 (이론상) 이모작이 가능하다”고 귀띔했다.
앞으로 우리 농업의 살 길은
심 대표는 40년 넘게 가톨릭농민회를 지켜왔다. 그동안 심 대표가 바라본 농민들의 현실적 고민은 ‘먹고 사는 것’에서 출발한다. 실제 통계청 ‘2024 농가경제조사’에 따르면 농가소득(농가의 총 합산 소득)은 5060만 원이었지만, 농업소득(농업활동으로 얻는 수익)은 958만 원으로 2023년 1143만 원보다 뒷걸음질쳤다. 농가도 농업 자체에 대해 큰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농업이 매력적인 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시장 친화적’ 농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심 대표는 “정부도 직불금을 인상해 농가의 소득을 보장하고 수매가를 오히려 낮춤으로써 해외 곡물과의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면서 “농민들도 농업 전문가가 돼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높일 수 있도록 연구하는 등 시장 친화적 농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심 대표는 정부와 농민 간 신뢰 구축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는 “농민은 시장 친화적 농산물을 생산하고, 정부는 정권 교체 때마다 정책을 바꾸기보다 전략 산업에 대해 장기적인 믿음을 줘야 한다”며 “정부와 농민·생산자·소비자 모두 농업에 애정을 갖고 장기적 관점에서 힘을 모았으면 한다”고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