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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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원산 해성학교 개교… 바다의 별, 희망의 등불이 되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8. 원산 해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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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차렷 자세의 원산 해성학교 어린 학생들과 구경꾼들, 유리건판,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지역 유일의 본당 부설 학교 10년 전에 폐쇄

1920년 7월 26일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함경도를 포함한 한국 북동부 지역을 관할하는 원산대목구를 설정하고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에 이관했다. 그러면서 초대 원산대목구장으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임명했다.

원산대목구 설정과 함께 1921년 5월 갑작스럽게 원산본당 주임을 맡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원산에서 두만강에 이르기까지 함경도 전체에 가톨릭 학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며 ‘해성학교’(海星學校)를 설립했다. 우리말로 ‘바다의 별’ 곧 ‘마리 스텔라’이다. 한없이 크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바다의 별처럼 우리 삶에 희망을 주는 등불 같은 존재인 성모님께 의탁해 가톨릭 교육 이념을 펼치겠다는 의지로 지은 이름일 것이다.<사진 1>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우리의 소망과 일치한다. 지역 유일의 본당 부설 학교는 10년 전에 폐쇄되어 지금은 허물어져 가는 작은 집일 뿐이다. 신자와 외교인들이 매일 사제를 찾아와 학교를 다시 열어 달라고 청하고 있다. 소년 30명이 한꺼번에 등록 신청을 하고, 새로 산 교리문답 책을 보여 주며 그들의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마침내 낡은 건물을 수리했다. 공사가 끝나자마자 생기발랄한 소년들이 신이 나서 입학했다. 첫 학년이 끝나고 방학 후 새 학년이 시작될 때는 1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학교가 11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없어서였다. 소녀들도 물러서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이 열등하다는 케케묵은 고정관념에 저항했다. 113명의 소녀가 갖은 고생을 감수하고 매일 학교에 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519~520쪽)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원산 해성학교 남학생 수업, 유리건판,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남학생 35명·여학생 12명으로 첫걸음

에카르트 신부는 수도원 목공 책임자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의 도움을 받아 긴 책걸상 6개만으로 해성학교를 시작했다. 개교 당시 교사 2명, 남학생 35명, 여학생 12명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에카르트 신부는 성인 25명에게 독일어를 가르쳤다. 개교식 날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학생들은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날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남녀를 구별해서 한 교실에서 함께 가르치고 공부할 수 없었다. 특히 겨울에 여학생들이 고생했다. 남학생이 먼저 수업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느라 몸이 꽁꽁 얼었기 때문이다.<사진 2>

“추운 날은 학교에 오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에게는 매일매일 수업이 소중하고, 다른 학생들이 배우면 자기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 어느새 원산에서 ‘제일 좋은 학교는 해성학교’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 1922년 2월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예기치 못한 방문을 받았다. 원산에서 도보로 3시간 30분 거리에 문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가톨릭 신자가 한 명도 없고, 반경 두 시간 거리 이내에는 학교도 없었다. 아이들은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독일 아이들이라면 기뻐했겠지만 겨울 지나 봄이 찾아오듯 서서히 깨어나면서 배움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슬픈 현실이었다. 개신교 목사들이 학교를 세워 주겠다고 했지만 문평 이장과 원로들은 영적 아버지인 신부를 원한다고 안드레아스 신부에게 호소했다. 돈은 없지만, 논밭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며 신앙을 가지겠다고도 했다. (?) 수사들이 학교를 완공하는 데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분도통사」 277~280쪽)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1909년 한국에 진출해 서울 백동(혜화동)에 수도원을 먼저 지은 후 성당과 학교를 지었는데, 원산대목구에서는 거꾸로 했다. 학교를 먼저 짓고 그 다음으로 성당을 보수하고, 수도원을 지었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원산 해성학교 운동회, 유리건판,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4년 남학생 500명·여학생 300명 달해

1921년 개교한 원산 해성학교는 얼마 안 가 비좁아졌다. 일본 정부도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했다. 급기야 1924년 봄학기에는 남학생이 500여 명, 여학생이 3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이에 비해 교실은 4개에 불과했다. 그래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1924년 9월 60명 정원의 교실 4개를 더 짓기로 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아와 그달 18일 원산 해성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5월 22일 열린 해성학교 운동회를 기록영화로 촬영했다.<사진 3>

“5월 20일 대규모 체육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여러 주 동안 교사들이 연습하고 준비했는데, 비가 억수같이 오는 바람에 5월 22일 금요일로 연기되었다. (?) 5월 22일 체육대회가 열렸다. 화창한 날씨에 며칠 전 내린 비로 운동장엔 먼지가 없었다. 체육대회는 원만히 진행되었다. 아이들과 관중이 하나같이 즐거워했다. 기록영화를 찍을 좋은 기회를 총아빠스님께서 놓치실 리가 없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카누토 다베르나스 신부의 유능한 지휘하에 우리 악단이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는 점이다.”(「분도통사」 382~383쪽)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원산 해성학교 여학생 수업, 랜턴 슬라이드,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무료 야간 빈민학교 ‘호수천신학교’도 운영

해성학교는 1925년 11월 21일 툿찡포교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4명이 원산에 도착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수녀들이 여성 교육과 유아 교육을 도맡았기 때문이다.<사진 4> 또 수녀들은 무료 야간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도 운영했다. 이런 헌신적인 수녀들의 활동에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9월 말 원산을 떠나면서 수도자들에게 수녀원을 짓는 데 인색하게 굴지 말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우리 해성학교는 시 당국과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훌륭한 사립학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월사금을 마련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한국 전체의 실상이다. 차이가 있다면 공립학교는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퇴학시키는데 우리는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학생들을 퇴학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 우리가 운영하는 학교를 살려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은인들이 변함없이 우리를 도와주느냐 않느냐, 새로운 은인들의 도움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달려 있다.”(「분도통사」 552~553쪽)

원산대목구 성 베네딕도회 남녀 선교사들은 독일 은인들에게 선교 자금을 요청하면서도 한국인들에게는 복종과 순응을 요구하는 자선가의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환대’했고, 배우기 위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을 단 한 명도 내치지 않았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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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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