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로 ‘비참한 사람들’을 뜻하는 ‘레미제라블’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에 갇힌 장발장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년의 옥살이’는 장발장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했던 당시 사회상을 보여준다. 출소 후 가톨릭교회 신부의 온정을 경험하고 새 삶을 살아가는 장발장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사랑과 연민의 힘을 알 수 있다. 빵을 훔치기 전까지 그에게 손 내미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동적인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장발장으로 인해 빵을 잃었을 것이다. 그의 사정은 참작할 수 있으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을 향한 연민의 시선을 강조했던 로마 교황청립 레지나 아포스톨로룸 대학 생명윤리학 교수 조셉 탐 신부를 인터뷰하며 한국의 낙태 상황을 물어본 적이 있다. 탐 신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비처벌화와 비범죄화는 엄연히 다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처벌은 안 할지언정 낙태를 비범죄화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병원에서 대놓고 낙태 시술을 홍보하는 한국 상황은 매우 특이하군요.”
최근 발의된 모자보건법 개정안들은 사실상 주수에 관계없이 만삭까지 낙태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약물 낙태는 물론, 낙태 시술에 건강보험급여도 시도한다. 낙태를 고려하는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돕기는커녕 등을 떠미는 모양새다. 여성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위기임신이라는 상황을 방지할 사회적 안전망이다. 상황을 이해하니 인간 생명을 살해하라고 종용해선 결코 안 된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빵까지 훔쳐야 하는 사회를 개선해야지, 사회가 이러니 빵을 훔치라고 독려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프랑스에서 최근 낙태권이 헌법에 명시된 이후 이곳의 여성권을 동경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낙태권이 곧 여성권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낙태는 최대 14주 이내에만 가능하다. 낙태권이 여성권이라고 치부한다면 낙태죄 후속 입법 부재로 무분별하게 낙태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여성권이 높은 국가다. 과연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