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조금 거슬러서 교회의 대이교(大離敎)가 40년 만에 막을 내린 1417년 피렌체로 잠시 가보겠습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로 1296년에 머릿돌을 놓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은 120년이 다 되도록 돔 지붕을 올리지 못한 채로 볼품없이 서 있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모두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돔을 포기했는데, 로마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자신이 돔을 올리겠노라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대성당의 돔은 건축 기술로만 공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사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선뜻 나선 사람이 귀족 가문도 아닌 신흥 은행가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 1360~1429)였습니다.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물려받은 은행업을 유럽 전역으로 번창케 하였고, 피렌체 공의회를 유치하며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만들었습니다. 코시모로 인해 피렌체는 번영을 이루고 메디치가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또한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여 마르실리오 피치노 같은 철학자를 양성하고,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했으며 산 마르코 수도원을 비롯한 많은 성당과 메디치가의 건물들을 건축하는 등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코시모의 묘비에 새겨진 ‘국부’라는 호칭은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16~1469)는 그의 별칭 ‘통풍 환자’(il Gottoso)가 말해주듯이 병약하여 코시모 사후 겨우 5년 동안 메디치가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가 피에로의 뒤를 잇습니다. 아버지와 달리 그의 이름 뒤에는 ‘위대한 자’(il Magnifico)라는 별칭이 따릅니다. 그는 모든 역경을 이겨낸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볼품이 없는 로렌초였지만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할아버지 코시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이룩해 놓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경제적·정치적 환경에서, 누나 비앙카와 동생 줄리아노와 함께 플라톤 철학과 인문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끄는 피치노가 카레지의 메디치 빌라에서 학술 토론회를 열었을 때, 열두 살의 로렌초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토론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로렌초의 정치적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공적 권력을 취하지 않고 피렌체의 한 시민으로 살면서 피렌체에 공화정 제도를 정착시키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달리 위풍당당하고 야심 찬 로렌초는 정치적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뒤가 아닌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다른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그들을 결집하게 만드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결국 파치 가문은 오랜 음모 끝에 메디치 가문에 끔찍하고 치명적인 사건을 자행합니다. 당시 식스토 4세 교황(1471~1484 재위)은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이었으나 피렌체의 국경 도시인 이몰라의 매입 문제로 로렌초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렌체에 대한 로렌초의 지배력에 위협을 느껴온 피렌체의 유서 깊은 파치 가문은 교황청과 접촉하여 로렌초를 무너트릴 계획을 세웁니다. 급기야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 미사 중, 거양 성체의 순간에 파치 일당은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를 습격하였습니다. 로렌초는 다행히 작은 부상을 입고 피신하였지만, 줄리아노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피렌체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 찼고, 파치 가문과 공모자들은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교황과 로렌초의 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습니다. 로렌초는 피렌체 시민들을 결집하였으나 동맹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전쟁은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혈혈단신으로 나폴리에 가서 페르디난도 다라고나(Ferdinando dAragona) 왕과 협상하여 교황과의 대립을 풀고 결국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피렌체에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견고해졌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로렌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서 많은 문인과 예술가를 후원하였습니다. 우선 로렌초 자신이 훌륭한 시인이었고 비올라와 플루트 연주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건축에 관심이 많아서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르네상스 건축물들을 좋아했고, 알베르티의 「건축물론」(De re aedificatoria)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는 필리피노 리피와 산드로 보티첼리 같은 화가를 후원하였고,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에게 피렌체의 토목과 건축 공사를 맡겼습니다. 또한 최초의 예술 아카데미를 산 마르코 수도원에 설립하였고, 그 덕에 어린 미켈란젤로는 이곳을 드나들며 예술가의 자질을 배우고, 로렌초의 둘째 아들이자 훗날 레오 10세 교황(1513~1521 재위)이 된 조반니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위대한 자’ 로렌초는 스무 살에 메디치가의 수장이 되어 많은 역경을 이겨냈지만, 그 역시 가족 내력인 통풍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갑자기 찾아온 합병증으로, 어릴 적 철학자들과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논쟁을 벌였던 카레지의 메디치 빌라로 이송되었고, 1492년에 그곳에서 43세의 나이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피렌체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그의 시신은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옮겨져 로렌초의 바람대로 소박하게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이후 산 로렌초 성당의 구(舊) 성구실에 안치되었다가, 훗날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신(新) 성구실(메디치 경당)에 동생 줄리아노와 마주 보며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로렌초는 일생을 개인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피렌체와 동일시했고, 피렌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피렌체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과했는지, 그가 죽자 2년도 안 되어 메디치 은행은 도산했고,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플라톤 아카데미도 문을 닫았고, 사보나롤라의 회개하라는 설교와 프랑스의 침공은 피렌체를 어둠 깊숙이 끌어내렸습니다. 그와 가까웠던 환희의 보티첼리도 비통에 빠졌고, 피렌체 극장은 르네상스의 종영을 서둘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