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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박해에 대하여(묵시 1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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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표징이었던 용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옛날의 뱀이었던 용은 땅에서 여인을 추격하고 여인은 그런 용을 피해 달아난다. ‘피하다’로 번역한 그리스말 동사 ‘디오코’(δι?κω)는 ‘박해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용은 여인을 박해한다. 그리고 여인은 용의 박해에 속수무책이다. 박해는 여인을 비껴가지 않는다. 박해는 여인을 쫓는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다. 큰 독수리 날개 덕분이다. 독수리 날개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탈출시킨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은유적 형상이다.(탈출 19,4; 신명 1,31-33 참조) 노예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행에 독수리의 날개는 하느님의 보호를 기리는 이스라엘의 갈망, 그 자체였다. 시편은 하느님의 보호를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온 그 옛날의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 수없이 호출되어 아픔과 슬픔,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갔다. 박해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박해는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맞닥뜨려야 할 운명과 같은 것이었고, 그 운명에 하느님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또렷했다.


박해의 시간은 제한적이다. 여인이 박해를 피해 피신한 곳에서 보살핌을 받는 시간은 일 년과 이 년, 그리고 반 년의 시간이다. 앞서 살폈듯이 이 시간은 은유적이다. 기원전 2세기 중반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 시간과 동일한 이 시간은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박해에 맞서 꿋꿋이 이겨낸 시간을 상징한다. 하느님의 보살핌의 시간은 실은 박해를 견디는 시간인 셈이다. 박해를 피한 시간이 아니라 박해 한가운데 머물며 하느님을 갈망한 시간이 일 년, 이 년, 그리고 반 년이었다.



용은 더욱 가열하게 여인을 박해한다. 용에게 여인은 사라져야 할 존재다.(묵시 12,15 참조) 강물 같은 물로 여인을 휩쓸어 버리려 한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 백성이 겪는 박해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대목에서 파도나 물 등이 나타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죽음의 파도가 나를 둘러싸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들이쳤으며….”(시편 88,7) 아니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직접 심판하실 때도 큰 강물 같은 물줄기가 등장한다. “그러니 보라, 주님께서는 세차고 큰 강물이, 아시리아의 임금과 그의 모든 영광이 그들 위로 치솟아 오르게 하시리라. 그것은 강바닥마다 차올라 둑마다 넘쳐흐르리라.”(이사 8,7-8) 


강물이 범람하여 큰물이 되었을 때, 그 위협적 장면은 죽음에 가까운 두려움을 형성한다. 여인이 하느님 백성을 가리키는 은유일 때, 용의 입에서 나오는 강물이 여인을 휩쓴다는 서술은 하느님 백성의 파멸이 용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사실을 들추어낸다. 우리의 이야기는 또한 용을 ‘뱀’으로 고쳐 부르는데, 태곳적 뱀의 시간과 하느님 백성이 겪는 박해의 시간은 우리의 이야기 안에 함께 겹쳐져 하나의 시간으로 고정된다. 뱀의 시간이 근원적이고 근본적 시간이라면, 역사의 어떤 순간도 박해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느님 백성의 운명은 박해와 함께 형성되고 흘러간다는 것. 어쩌면 박해의 시간이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드러낸다는 것.


박해와 고통 들이닥치더라도


하느님의 보호와 도움 믿으며


기꺼이 짊어지려는 자세 필요


그러나 용의 박해는 큰 독수리 날개에 의해 실패했듯, 땅에 의해 또다시 실패한다. 땅이 물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탈출기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쫓던 이집트 군사들이 홍해 바다에 빠진 것을 두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당신께서 오른손을 뻗으시니 땅이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탈출 15,12)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하느님의 도우심의 결과로 이해하고 믿었다. 땅이 물을 삼켜 여인을 구해준 것은 그 옛날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탈출을 도우신 것을 염두에 둔 서술이다.


박해와 고난은 현존하되, 하느님 백성을 치지는 못한다. 삶의 고통은 여전하되, 하느님 백성의 존재함은 무너뜨리지 못한다. 삶의 고통은 비록 힘든 것이나, 삶 자체를 파괴하지는 못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광야의 척박함을 맞닥뜨렸고 힘든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했다. 사는 것과 힘든 것 사이에 이스라엘은 꿋꿋이 견디어 내었고, 그 인고의 삶을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되뇌고 곱씹는 일을 지금껏 해내고 있다.


이런 서사에서 배울 건 이런 게 아닐까. ‘하느님, 우리를 보호하시어,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소서’라는 기도는 가급적 조심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오히려 ‘하느님, 이 고통 속에 당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은 ‘이 고통의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묻는 일이 기도여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고통에 대한 공부에 관한 것이다.


마침, 여인의 이야기는 그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17절에서 읽게 된다. “그러자 용은 여인 때문에 분개하여,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 싸우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여인의 후손을 가리켜 땅의 교회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땅에 살아가는 믿는 이들은 땅의 삶 한가운데서 계명을 지키고 증언을 실천한다. 용은 그런 여인의 후손들과 싸우려는 기세를 꺾지 않았다. 


여인의 후손들은 박해와 고통에 대해 여전히 공부해야 한다. 공부의 끝은 영광과 기쁨 혹은 행복과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 박해와 고통은 오롯이 땅의 교회가 살아가는 삶 자체이므로, 어쩌면 교회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겠다. 교회는 간절한 행복이 아니라 처절한 고통과 슬픔에 동반자가 되어야 할 일을 제 몫으로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용, 그 옛날 뱀과의 싸움을 우리 믿는 이들은 기꺼이 짊어질 수밖에. 박해와 고통은 막으려 덤벼들 일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고 증언을 실천할 우리 믿는 이들의 처소라고 다짐하며. 고통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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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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