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합니다. 우리 집이 대대로 구교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조상 대대로 성모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자랐다면, 제 병을 둘러싼 모든 고통도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요. 저희 가족의 신앙은 제가 병을 진단받으면서 찾아왔습니다. 그때 일가가 천주교인이 되었고, 그 시작은 어머니 김마리아였습니다.
처음 누가 “성당에 가보자”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를 오가며 숲길 한가운데 무릎 꿇고 기도하시던 성모상의 자태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기억이 어머니 안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포근하고 정결한 기운이 발걸음을 이끄신 것이겠지요.
어머니는 제 병을 진단받은 날 이후로 며칠 밤낮을 식사도 하지 못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셨습니다. 아들의 예후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신심 깊다는 자매들은 조상의 죄 때문이라 말했지만, 그런 말은 고통 중인 어머니에게 위로도, 전교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저 “성당 가보자”는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에게는 말보다,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해주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이후 어머니는 매일 십자가와 은혜의 성모님 앞에 촛불을 밝히십니다. 어머니는 인색할 정도로 자랑하지 않으셔서, 가끔은 서운한 마음도 듭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신앙단상을 연재하는 지금도 지인에게 단 한마디 알리지 않으십니다. 아들의 영을 위한 기도는 하시지만, 육적인 성공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뜻은 매번 회심을 이끌어 줍니다. 저는 어머니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게 되었고, 그 신앙의 원천이 늘 어머니였음을 고백합니다.
3년 전, 감곡매괴성모성지를 다녀오는 길에 어머니는 차 안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그 순간, 제 곁에 서 계신 성모님의 형상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두 차례, 어머니는 성모님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마리아야.” 그 음성은 어머니 안 깊숙이 자리했던 오래된 상처, 모태의 상흔을 부드럽게 건드렸고, 치유를 경험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의 고통 곁에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신다고.
어머니는 제가 첫영성체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을 꾸셨습니다. 팔을 벌린 채 “하느님이시다!” 하고 주님을 찬양하셨고, 본당으로 향하던 길은 풀밭으로 바뀌어 그 위를 제가 걷고 있었답니다. 곧 배경은 바뀌고, 중앙 돌계단 위에 하얀 옷을 입은 분이 서 계셨고, 그분 주변에는 모두 백의를 입은 다섯 사람이 반원 모양으로 둘러 서 있었답니다. 그때 손의 형상이 나타나 제 등을 밀어 계단을 오르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의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머니는 알지 못하십니다. 다만 제가 하느님을 굳게 믿게 된 까닭이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믿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성모님, 제 상처도, 제 아이의 병도 어머니 앞에 놓습니다.”
어쩌면 병은 초대였는지도 모릅니다. 성모님 곁에, 십자가 아래에 말입니다. 그 자리는 고통만 머무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숨겨두신 보물이 깃든 자리였습니다. 병을 이유로 공허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 계시길 바라시는 예수님의 성심을 의식하며 걷는 삶의 여정은 사라지지 않는 위로가 되고, 채워주시는 기쁨이 되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지도 않았을 때 먼저 다가오시고, 측은지심으로 이끄시며 도와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 높은 데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 안으로 내려오신 참된 인성 자체이십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은총의 얼굴들이 하나둘 드러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고통 안에 계셨고, 그 속에서도 저를 한 번도 놓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가정사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가정의 여왕으로 세우신 성모 마리아를 우리 삶 깊이 받아들입시다. 하느님의 권한이 가정의 주인이 될 때, 성령님께서 가장 작은 교회인 우리의 집에 강림하시지 않을까요.
신선비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