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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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기 유일한 국내 신학교, 공산정권에 의해 강제 폐쇄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0. 덕원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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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덕원신학교’,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원산대목구 설정 직후 덕원신학교 설립

“좋은 신학교를 이룩하려면 조급한 마음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이 말은 신학교에서 성장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에게도 해당된다. 선교지에서 신학교를 성공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더 힘들다. 어린 학생들은 지금까지 길들여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생활과 사고방식 가운데서 성장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고 나면 자신이 배운 것을 동포들에게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교사가 불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정력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개인적 선교가 성취됨을 발견해야 한다.”(「분도통사」 504~505쪽)

1920년 8월 5일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함경남북도와 간도 지방을 관할하는 원산대목구를 설정해 한국에 진출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에 위임하자 선교사들은 곧바로 신학교를 설립했다. 수도원 소속 사제뿐 아니라 원산대목구를 비롯한 한국 교회 교구 사제, 그리고 실업학교인 숭공학교 출신의 평수사 양성을 위해 원산대목구가 운영하는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세웠다.

원산대목구장 겸 덕원수도원장인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1920년 서울 백동수도원에 있던 숭공학교 일부를 고쳐 소신학교로 운영했다. 이후 1927년 서울 백동수도원이 덕원으로 완전히 옮겨짐에 따라 신학생들 역시 덕원수도원 옆에 새로 지어진 성 빌리브로로드 신학교, 곧 덕원신학교로 모두 옮겼다.<사진 1>

“덕원역에서 내려 30분 정도 거리를 걸어서 베네딕도 수도원 전경을 마주했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멀리서 봐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푸른 숲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우뚝 솟은 종탑이 보이는 수도원과 그 옆에 신학교가 있었다. 신학교 뒤편으로는 수목이 울창한 얕은 야산이 있었고 그 너머로 동해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수도원 앞으로는 넓은 논밭이 시원하게 트여있었는데 그 들판 한가운데로 서울에서 함흥과 청진으로 가는 기차가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72쪽)

덕원신학교는 1921년 11월 3일 소신학교 신입생 14명으로 개교했다. 교장은 안셀모 로머 신부였다. 교육 과정은 예비과 2년, 소신학교 6년, 대신학교 6년 등 14년이었다.<사진 2> 예비과는 보통학교 교과를 주로 보충했다. 소신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교리·기하·대수·한국어·독일어·일본어·역사·지리·화학·미술·음악·체조 등을 가르쳤다. 대신학교에서는 철학 2년, 신학 4년의 교육이 이어졌다.<사진 3>

교수진도 탁월했다.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자신들이 양성한 한국인 사제들의 신앙과 학문 수준을 높이기 위해 역량이 뛰어난 교수진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철학과 신학 교수는 반드시 박사 학위 소지자로 배정하려 했다. 그 결과 덕원신학교는 1921년 개교 이후 일제 말기까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박사 학위 소지자 교원을 확보한 신학교였다.
<사진 2> ‘덕원신학교 수업’,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기도 중인 선교사와 신학생들’,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윤공희 대주교와 김남수·지학순 주교 등 배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맨 먼저 부딪히게 되는 난관은 라틴어 시간이었다. 소신학생은 일반과목 공부도 해야 하지만 라틴어 공부는 필수였다. 당시 미사를 전부 라틴어로 드리고 있었고 또 대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 과목을 모두 라틴어로 강의를 들어야 했으므로 라틴어를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롭고 가족적이었다. 교수 신부님들이 독일 베네딕도회 소속이었으니 독일인의 합리적인 성향이 그대로 묻어났을 것이다. 학교의 규모는 작았지만, 운영은 짜임새가 있었다. 학교 교칙에는 성문화된 규율이 없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였다. 교수 신부님들은 학생들에게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깨쳐서 배워나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지도하였다.”(「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82~87쪽)

덕원신학교는 신입생을 격년제로 모집했다. 그러다 평양대목구가 신학생 양성을 맡기고, 원산대목구와 연길대목구 신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1941년부터는 해마다 신입생을 받았다. 또 조선총독부가 정식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1942년 서울대목구 예수성심신학교를, 이듬해인 1943년 대구대목구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폐교함에 따라 덕원신학교 신학생 수가 100명이 넘을 만큼 늘어났다. 덕원신학교는 한국 교회에서 유일하게 일제의 정식 설립 인가를 받은 신학교였기 때문이다.<사진 4>

1936년 6월 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에 연길대목구 출신 김충무(클레멘스)·한윤승(필립보)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개교 후 14년 6개월 만에 덕원신학교 출신 첫 번째 사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덕원신학교는 1949년까지 40명의 사제를 배출했다. 덕원신학교 출신 사제로는 윤공희 대주교와 고 김남수·지학순 주교, 하느님의 종 김치호 신부 등이 있다.
<사진 4> ‘덕원신학교 음악 수업’,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5> ‘덕원신학교 신학생들’, 유리건판,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49년 ‘순교자 찬가’ 부르며 떠난 신학생들

덕원신학교는 1949년 5월 9일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도원과 함께 강제 폐쇄됐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독일인 수도자들이 체포됐고, 수도원과 신학교는 강제 몰수됐다. 이후 덕원신학교 신학생들은 귀가했고, 일부 신학생들은 남하해 서울 대신학교로 편입, 훗날 사제품을 받았다.<사진 5>

“한밤중에 일어나 복도에 나와 있는 신학생들 앞에 정치보위부원이 소리쳤다. 그는 신학교 건물 현관 옆 조그만 응접실에서 늘 학교를 감시하고 있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신부들의 압제에서 풀려났습니다. 이제 해방입니다!’ (?) 그 밤으로부터 일주일간 우리는 신학교 건물 안에서만 갇혀 지내야 했다. (?) 일주일이 다 되어갈 무렵 그 주 금요일에 당 간부가 우리를 불러 신학교를 폐쇄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당장 모두 귀가 조치할 것이라며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짐 보따리 속에 종교와 관련된 어떠한 물건이나 옷·책을 숨겨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5월 13일 금요일 73명의 신학생과 26명의 수사가 수도원을 나섰다. 모든 개인 물품은 조사당하여 성물과 수도복·단 한 권의 서적도 갖고 나올 수 없었다. 묵주까지도 다 빼앗아 갔다. 신학생과 수사들은 수도원 밖으로 나와 열을 지어 걸어가면서 다 같이 ‘순교자 찬가’를 부르며 발길을 옮겼다.”(「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179~182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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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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