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을 설명하는 데 안봉근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포선·합죽선·궁갑 유물카드(위에서부터).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 소장
1930~1931년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서 한국 유물 정리·교육용 모형 제작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딴 손기정에게 태극기 처음 보여주며 민족정신 일깨워
현지인 학예사에 한민족 노동 방식·풍습·관습 전하고 학문적 정립에도 기여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
안봉근은 독일 남동부에 위치한 작센주의 주도인 드레스덴의 민족학박물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작센주 기록보관소의 문서에 따르면, 안봉근은 1930~1931년 박물관에서 일했다. 현재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컬렉션은 약 670점이다. 이를 수집하여 박물관에 판매했거나 기증한 사람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고종의 정치 고문으로 조선에서 활동했던 묄렌도르프와 그의 딸 엠마도 있다.
안봉근이 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했음을 입증해주는 자료는 기록보관소의 문서 외에 박물관 유물카드와 그가 만든 교육용 모델 그리고 사진이다. 안봉근은 유물카드에 한국어로 유물명을 적거나 한글을 로마자로 표기했다. 함께 작업하던 학예사가 “안봉근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이라는 설명을 통해 그의 도움을 받았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안봉근은 겨리쟁기·괭이·호미·낫·방앗간과 초가 등 박물관에서 한국의 농업과 문화를 알리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교육용 모형’ 17점을 만들었다. 그중 방패연·초가·방앗간 모형은 전쟁 중에 유실돼 사진과 유물카드로만 남아있다.
드레스덴박물관 소장 한국 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은 것은 제주도 유물이다. 한국 유물 600여 점 가운데 232점이 제주도 민속유물이다. 1929년 5월 제주 산지항으로 입국한 독일인 발터 슈퇴츠너가 6주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수집해갔다. 1917년 한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수만 리 타국에서 고국의 유물을 만지면서 안봉근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황해도 청계동에서 청년이 될 때까지 함께 살던 할머니 고 안나의 고향, 제주의 물건을 대했을 때 평소 할머니가 들려주던 제주의 푸른 바당과 돌하르방 이야기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손기정, 안봉근 집에서 태극기를 처음 보다
1964년 1월 4일자 동아일보에 좌담회 기사가 실렸다. 역대 올림픽 참가와 뒷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참석자 중 한 사람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아우구스티노, 1912~2002) 선수였다. 손기정은 기차로 시베리아를 거쳐 베를린까지 가는 데 17시간이 걸렸다며 기억에 남는 일화로 안봉근의 집에 초대를 받았던 일을 말했다. “교포 집에서 첫 축승회가 있었는데 안봉근씨라고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어요. (그의) 독일 부인이 쌀밥에 두부·닭고기 국을 끓여줘서 잘 먹었습니다.”
손기정은 1976년 신문에 베를린올림픽을 회고하는 글을 연재하면서 안봉근에 관해 더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렸다. ‘안봉근 집에서 처음 본 태극기’에 대한 것이었다. “올림픽 성화가 꺼지고 수일 후 권태하 선배·정상희 대표 그리고 나와 남형(남승룡) 등 조선인 10여 명은 베를린에 거주하던 안봉근씨 댁에 초대를 받아갔는데 (?) 나는 안 선생 댁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볼 수 있었다. 태극의 의미를 차근차근하게 설명해주는 안 선생의 얘기를 들으며 방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안봉근이 태극기를 달고 뛰지 못한 조선의 선수들을 안타까워했다고도 했다. 경기 전에 조선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으나 혹시 일본인들이 알게 되면 괜한 트집을 잡아 다음 올림픽에 조선 선수들의 경기 출전을 막을까 걱정돼 그러지 못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두부 공장을 하던 안봉근의 집에서 ‘내 땅 냄새가 물씬 나는 두부’를 양껏 먹었다고 술회했다.
안봉근이 만든 모형 농기구인 가래, 겨리쟁기, 낫, 호미(왼쪽부터).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 소장
유물을 설명하는 데 안봉근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포선·합죽선·궁갑 유물카드(왼쪽부터).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 소장
다른 이들의 기억 속 안봉근
손기정은 안봉근을 이렇게 기억했다. “앞에 놓인 장벽을 들이받고 많은 손실을 보기보다는 우회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으며 투쟁보다 화해를 앞세우는 한국 정신의 한 표현 같았다.” 손기정은 달리기만 알던 자신이 안봉근의 집에서 처음 본 태극기와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을 통해 민족주의자로 변했다고 했다.
안봉근을 기억한 또 다른 이는 마르틴 하이드리히다. 그는 드레스덴박물관의 학예사로 한국 유물 정리 및 논문집 「한국의 농업」(1931)을 출판하면서 안봉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이드리히는 학문적 기여를 인정받아 박물관장으로 승진하고 나중에는 쾰른대학교의 민속학 교수가 된다. “나는 안봉근씨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그는 나의 끊임없는 질문에 기꺼이 그리고 지치지 않고 응답해주었다. 한민족의 노동 방식·풍습·관습에 대해 이처럼 능숙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안봉근은 한국 유물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농업과 민속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정리에 참여했던 제주도 민속유물 70여 점 100년 만에 한국 돌아와 전시
신앙 안에서 자라난 안봉근의 선의(善意)는 사람을, 세상을 변화시켰다. 현재 드레스덴박물관에서 안봉근이 정리에 참여한 제주도 민속유물 70여 점이 100년 만에 돌아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8월 31일까지다. 마치 안봉근 요한이 돌아온 듯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