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몸 신학’을 교육학이라 정의하며(59과 2항) ‘공부(Studio)’라는 단어를 13회 이상 사용했다. 그리스도 말씀에 바탕을 둔 분석과 묵상을 인간 교육과 자기 교육에 가장 적합한 ‘몸 교육학’ 관점으로 접근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만, 시편에서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의 빛을 비추소서”(4,7)라고 노래하듯이, 하느님 시선으로 나를 비춰야만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근원적으로 주어진 몸의 아름다움에 담긴 진리의 빛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했다. 아름다움에 취해, 그에 합당한 생각과 행동으로 자신의 인생을 베틀에서 천을 짜듯 한 줄 한 줄 빚기를 바라셨다.
몸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초월 세계를 그리워하고 또 증거한다. 순간순간 열린 마음으로 성령과 함께 자신의 구원 역사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즉 내가 그분 안에 완전히 담기게 될 때까지, 몸은 쉼 없는 사랑의 역동성이 내재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산업이 분업화되듯 인간의 몸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의 기능 혹은 역할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 바탕에는 인간을 육체적인 면과 그 안에 있는 영적인 면으로 분리하여 몸을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한다.
‘몸 신학’은 단순히 교리가 아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존재하는 인간에 관한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몸 교육학’이다. 인간 몸은 “인격의 표징”, 즉 그의 영혼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몸에 대한 통합적 진리를 알 때, 어느 한쪽만을 향한 선택을 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 이런 교육은 절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몸을 균형 있게 받아들일 때, 세상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빛 속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빛을 받아 자신을 통과시킬 때 문을 활짝 열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고, 세상은 그 빛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에 합당한 세 가지 지복, 육화된 지복(인간은 순수한 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이요, 신적 지복(하느님과 함께하는 무한에 대한 갈망)이며 공동체적 지복(함께 하는 세상을 만든다)이 된다.
몸 신학의 교육학을 ‘몸의 영성’ 관점에서 이해할 때 인격 간의 친교 안에서 참된 ‘질료’가 되고, 영적 성숙을 통해 자신의 몸에서 혼인적 속성을 발견하고 그 삶을 실현한다. 생물학적 지식은 인간 인격에 합당한 영적 성숙과 함께 할 때 그 의미를 발견하지만, 그 반대일 때는 하나의 물질이며 조작 대상으로 취급되는 부끄러운 소식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듣는다.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있는 현 상황을 바라보고, 무엇보다 인격인 인간에 대한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
포도밭은 그리스도 안에 인격적으로 접목된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한다.(요한 15,1~17 참조) 포도나무는 가지 하나하나에 자신의 수액을 줌으로써 생명을 나눈다. 만약 수액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이제 그분은 내가 살아가는 데 내재된 원리가 됐다. 종이 아니라 벗이고, 자녀이기에 강제성은 없다. 맏형인 그분이 자신을 내어놓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그 사랑에 물들어 간다. 그리고 완성을 향한 목마름은 지향을 더욱 견고히 하며 변화의 길을 걷는다.
이렇듯 몸 신학은 몸의 교육학일 수밖에 없고, 그에 맞는 질서와 사랑의 표현들이 최종 목적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 신학은 몸을 계기로 삼는 인간학이요, 신학의 새로운 체계를 호소하는 지점이다. 리옹의 이레네오가 묘사하듯 먼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하느님으로, 하느님의 모상성에 담긴 신비요 계획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