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수도원 들어갔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수도원 떠나 40년 요리 외길
“형제들과 함께 살게 돼 행복”
수사들 위해 정성 가득 한 끼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불암산 기슭. 우거진 배나무 숲을 따라 올라가니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소박한 주방 문이 열려 있다.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른 조리사 김순필(헨리코, 71)씨가 한창 점심 식사를 준비 중이다. 이날의 점심 메뉴는 두부찌개와 오이무침·감자볶음·깻잎 등으로 차린 소박한 한 끼. 갓 쪄낸 감자와 신선한 블루베리도 함께 식탁에 올랐다. 올해로 7년째, 김씨는 기도하고 일하는 수사들을 위해 식사를 차려내고 있다.
그에게 수도원은 낯설지 않은 공간이다. 사제의 삶을 동경한 그는 서른 살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입회해 주방 소임을 맡으며 요리를 배웠다. 종신 서원을 1년 앞두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수도원을 떠났다.
수도원을 나온 후 김씨는 본격적으로 요리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산 조선호텔에서 12년간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이후 거제도에서도 한 호텔의 뷔페식당 책임자로 근무했다. 이어 ‘김순필 피자집’을 열어 피자와 스파게티를 팔았고, 부산에서는 돈가스와 샌드위치를 팔았다. 폐교된 부산가톨릭대 신학대에서 조리 봉사도 했다.
40년 넘게 요리에 몸담아온 어느 날, 그는 수도원에 안부 전화를 걸었다가 주방 소임을 하던 수사가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시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수사들은 회의를 통해 30여 년 전 수도원을 떠난 그를 다시 ‘수도원의 주방’으로 초대했다. 당시 환갑을 훌쩍 넘긴 그는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 칼을 들었다.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그는 한 달에 한번 경남 양산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러 내려간다.
수도원의 하루는 조용하지만 분주하다. 김씨는 아침 일찍 제철 식재료를 챙기고, 텃밭에서 가지·상추·대파 등을 직접 따와 요리에 활용한다. 주방 소임 수사와 함께 인근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도 그의 몫이다. 수사들과 손님들까지 하루 평균 15명분의 식사를 책임진다. 식사 준비 외 시간에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 규율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에 따라 공동 기도 시간에 참여한다.
“형제들과 함께 웃으며 같이 산다는 것이 제게 큰 기쁨입니다. 대화를 나누며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요리에는 정성과 배려가 담긴다. 계절에 따라 제철 식재료를 쓰는 것은 물론, 요즘 같은 때는 메밀국수·콩국수 등 시원한 메뉴를 내놓는다. 늘 처음 요리를 배우는 학생의 자세로 임한다. 함께 일했던 호텔 주방 후배와 동료들에게 전화해 요즘 유행하는 조리법을 묻는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 조리법과 먹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했다.
올해는 특별한 손님들이 많았다. 올해 초 경북 왜관을 찾은 전 세계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자치 수도원 원장들에게 식사를 대접했고, ‘시노드 교회’를 위한 본당사제 모임에 참석한 신부 60명과 안동교구 사제단 60여 명의 식사도 준비했다. 신부들은 “아침 식사가 호텔 수준”이라며 감탄했다. 아침 식사를 자주 거르는 신부들을 위해 그는 특히 아침 식사에 더 신경을 쓴다.
“지금도 요리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임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 주방 봉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