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마음의 구원’에 대해 약 1년간 말씀하셨다. 마지막 주제는 예술 작품에서 표현되는 알몸에 관한 놀랍고도 균형 잡힌 고찰이다.
인간을 주제로 하는 문학, 미술, 음악, 춤 등은 몸을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의 대상으로, 벗긴 몸으로 소모품화한다면, 그것은 ‘외설’, 즉 외설 문학, 외설 영상이 된다.
우리는 성지순례나 외국을 여행할 때 알몸을 표현한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나는데, 관능을 초월한 아름다움에 매우 놀란다.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인격적 경이로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예술, 특히 그리스 문화에서 인간의 벌거벗은 몸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지닌 존엄성과 아름다움, 그 자체로 인간-인격의 신비로운 승화의 요소를 보게 한다.
인생의 전 과정에서 체험되는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쾌락과 사랑, 종교, 죽음, 자유 등은 그 주제 의식과 표현 기법에 따라 예술과 기술 사이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렇듯 예술은 몸 신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몸을 예술가의 보이지 않는 영역의 세계를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설은 그렇지 않다. 외설은 마음 안에서 몸의 의미와 가치가 변형되고 파괴된 것으로 욕정을 일으키려는 구체적인 시도다. 마음의 깨끗함에서 지향이 변질된 것이고, 인격의 존엄성과는 반대의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드러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다. 외설은 인간 인격을 은폐한다. 인간은 벗기거나 벗은 목적에 따라 대상화된다. 또 무작위로 복사, 전파할 수 있다. 외설의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적 특성, 인간 몸의 표현 능력 등을 마음 안에서 왜곡시킨 것이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미지를 소비하고 상품화한 것이다.
예술가의 사유와 철학이 깃든 각 작품은 관람자들의 정신과 생각에 스며들어 공감을 얻게 되고, 은유적인 표현들은 종교적 이미지와 연결돼 관람자의 영혼의 창을 두드린다. 하지만 창작자와 관람자의 상상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기에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인간은 감수성이 매우 발달한 존재다. 벌거벗은 몸을 대할 때 부끄러움의 한계를 넘어선다면, 몸의 내밀함의 권리가 침해당함을 느낀다면, 선물과 상호 자기 증여의 법칙이 침해당한다면, 벌거벗음과 연결된 인격적 감수성이 침해당했다고 느낀다면 외설로 비난받을 수 있다.
몸을 묘사하는 예술 행위에는 특별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 이유는 몸이 인격의 가장 내밀한 선물을 드러내고, 알몸에 대한 묘사가 인간 신비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인격을 비하할 수도,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로서 철학자요 신학자요 예술가다. 삶을 해석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사람됨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문화예술 전문가는 예술 작품의 대상이 갖는 충만한 가치의 진리를 인식해야 한다.
또 예술 작품은 사회적 소통에 큰 영향력을 미치므로 윤리적인 면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이 벌거벗은 몸이 갖는 윤리적 질서가 가리키는 몸의 근원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형태가 된다면, 이는 일종의 일탈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심을 가져온다.
예술은 우리의 삶과 별개로 먼 곳에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삶 속에 들어온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술은 우리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예술을 ‘영혼의 노래요 춤’이라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충만한 생명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