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테는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교황청 안에 건축 공방을 만들어 설계에서 시공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건축 교육을 하였습니다. 라파엘로가 그 공방에 있을 시기에 시에나 출신의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re Peruzzi, 1481~1536)가 합류하였습니다. 1481년 시에나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화가로 활동한 페루치는 키지 가문의 ‘빌라 레 볼테’를 설계하면서 키지 가문과 가까워졌고, 건축가로서의 경력도 쌓았습니다.
율리오 2세 교황의 신임이 두터웠던 시에나 출신의 교황청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고향의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를 교황에게 추천하였고, 1503년 페루치는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건축 공방에서 일하면서,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에게서 고대 로마 유적의 연구와 르네상스 건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특히 브라만테의 중앙집중형 공간 구성과 로마 고전주의의 해석법, 그리고 라파엘로의 공간 규모의 축소 방식과 장식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력에서 페루치도 라파엘로처럼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에서 매너리즘 건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던 건축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후 키지는 테베레강가 자신의 별장인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의 설계를 페루치에게 맡겼는데, 이 빌라는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인 ‘빌라 마다마’(Villa Madama)보다 10년 앞선 것이었습니다.
빌라 파르네시나는 규모는 작으나 중앙에 본 건물이 있고 양쪽에 부속 건물이 이어지는 초기 빌라의 유형을 띠는데,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가 다수 있으며 상당히 호화롭게 지어져 당대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페루치는 로마 생활 초기에 화가로 활동하면서, 연극 무대 설계를 부활시켰고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그의 밑그림 수백 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15세기에 알베르티가 그랬던 것처럼, 전인적(全人的) 재능을 갖춘 16세기의 만능인이었습니다. 특히 건축 이론서를 제자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4)와 함께 작업했는데, 「건축 7서」가 세를리오의 이름으로 발간되었지만, 책에는 페루치의 이론과 밑그림 상당 부분이 담겼습니다.
또한 페루치는 브라만테 아래서, 그리고 라파엘로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그가 설계한 ‘산텔리조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의 공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브라만테 이후 라파엘로가 맡았던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가 총감독이 되었고 페루치는 보조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페루치는 2년간 볼로냐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산 도메니코 성당의 ‘기실라르디 경당’(Cappella Ghisilardi)을 설계하였습니다. 기실라르디 가문의 의뢰로 설계한 경당은 그릭 크로스 평면으로 계획되었으며 모서리에 있는 네 개의 도리스식 오더가 지붕을 받치는 형태입니다. 경당 설계 후 페루치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그의 실험주의가 표현된 경당 공사는 1530년대까지 설계안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527년에 로마가 약탈당하는 혼란의 시기가 있었고, 이후 페루치는 1531년에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다시 참여하여, 1534년에 건축 총감독이 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총감독이 된 페루치는 그의 설계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계획안이었던 브라만테의 평면도에서 중앙 크로싱의 돔은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평면은 사방에 작은 공간으로 분할되었고, 공간의 크기뿐만 아니라 형태도 달랐는데, 원, 타원, 반원, 사엽형, 사각형 등의 형태가 겹 공간으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브라만테가 처음에 설계한 중량감 있는 공간 구성은 사라지고, 라파엘로의 평면보다도 훨씬 다양해지고 작게 분할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앙집중형 평면이지만 공간은 중심으로 집중되지 않았고 오히려 바깥으로 분산되었습니다.
페루치의 이 계획안은 전형적인 매너리즘 형태를 보여줍니다. 매너리즘의 문을 열었던 라파엘로도 성 베드로 대성당 계획에서는 로마 고전주의에 입각한 전성기 르네상스의 정통성을 이었는데, 페루치는 르네상스의 전체적 통일성과 중심성을 과감히 파괴하였고 매너리즘의 특징을 전면에 드러내었습니다. 특히 페루치가 타원형의 형태를 사용한 것은 전형적인 반고전주의에 해당합니다. 타원형의 대표적인 로마 건축물이 콜로세움인데, 고대 로마 건축물이 원의 형태를 선호한 것을 보면, 타원형의 건축 형태는 분명히 로마 고전주의로부터의 일탈에 해당합니다.
페루치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팔라초 마시모 알레 콜로네’(Palazzo Massimo alle Colonne)입니다. 이 팔라초의 중요성은 본격적으로 초기 매너리즘을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팔라초 마시모 알레 콜로네는 로마 약탈 때 소실된 건물 자리에 세워졌는데 남아 있는 건물을 최대한 살려서 설계되었습니다. 이 팔라초는 마시모 가문의 두 형제를 위해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평면도를 보면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지를 최대한 활용한 탓에 건물의 축이 기울어져 있고, 파사드도 곡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팔라초 마시모가 매너리즘 형태인 것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질서를 벗어난 파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파사드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쌍기둥이 아니면서 기둥 두 개가 애매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전 고전주의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파사드가 건물의 중심에 있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지상 2층의 작은 창도 위쪽은 단순한 데 비해서 아래쪽은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불균형을 이룹니다. 또한 1층의 기둥들이 보여주는 수직성과 코니스의 강한 수평성은 조화롭지 못한 구성입니다.
페루치는 대표적인 한두 건물을 제외하면 성 베드로 대성당처럼 대부분 다른 건축가들과 연계된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건물에는 로마 고전주의가 아닌 매너리즘적 요소가 스며 있으며, 이를 통해서 후대의 건축가들에게 페루치 방식의 잔잔한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