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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한 첫 번째 정념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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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념들의 첫 번째이자 근본은 바로 사랑이다”(I-II,26,2)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어떤 선한 것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게 할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은 그 대상인 선과 결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이란 매우 다양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토마스가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토마스는 우선 ‘어떠한 유형의 선을 향해서도 기우는 모든 경향’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곧 이것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식물도 지닌, 그들의 본성에 합치되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연적 사랑’, 동물이 감각적 욕구를 따라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감각적 사랑’, 인간의 자유로운 판단과 의지를 뒤따르는 ‘이성적 사랑’이 그것이다.(I-II,26,1) 


물론 인간에게는 그 세 가지 모두가 나타난다. 인간에게는 공기에 대한 폐의 응답, 더운 날의 시원한 바람에 대한 감각적 욕구의 응답,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의지의 응답이 모두 있다. 토마스는 완전한 사랑으로 알려진 ‘참사랑(Caritas)’을 중시하지만, 이것은 ‘신학적 덕’을 다루는 「신학대전」 제2부 제2편에서 상세히 다루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루어 두도록 하자.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정념으로서의 사랑’은 바로 인간의 이성적 사랑에 속한다.



욕정의 사랑과 우정의 사랑 구분


토마스는 이성적 사랑을 ‘욕정의 사랑’(Amor Concupiscentiae)과 ‘우정의 사랑’(Amor Amicitiae)으로 세분한다.(I-II,26,4) 욕정의 사랑은 어떤 선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유익이나 기쁨을 바랄 때 이루어진다. 예컨대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사랑하는 것은 음식 자체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그 음식이 자신에게 주는 유익 때문이다. 


그런데 토마스가 여기서 사용한 욕정이란 말은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소유’라는 중립적 개념과 상통한다. 이 자동차, 이 집은 나의 것이고 내가 그것을 소유한다. 이렇게 욕정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물 또는 사람 자체의 실체적인 본성이나 인격성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우정의 사랑은 상대 자체의 선함을 위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태도이며 그 대상의 개별성을 깊이 존중한다. 예를 들어, 친구의 행복이나 성취 자체를 바라는 마음은 내가 그로 인해 직접적 이득을 얻지 않아도, 단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정서이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 자체를 바라는 마음 역시 우정적 사랑의 대표적 예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 두 사랑은 배타적이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작용한다. 그는 욕정의 사랑의 타당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우정의 사랑에 종속시킨다.(I-II,26,4) 따라서 우리는 먼저 욕정의 사랑 즉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할지로 시작하지만, 진정한 덕의 관점에서는 존재 자체의 선을 바라는 우정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의 원인


이어서 토마스는 사랑의 세 가지 원인을 언급하는데, 그 원인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북돋워 주고 서로 안에 포함된다. 우선 사랑의 고유한 원인은 ‘선(善), 즉 각자의 본성에 어울리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악이 선처럼 나타나게 될 때도 사랑하게 된다.(I-II,27,1) 말리고 싶은 이와 사랑에 빠진 이에게 하는 ‘사랑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사랑하는 사람은 흔히 다른 모든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귀한 선을 찾아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둘째, 사랑의 가까운 원인은 선에 대한 ‘인식’이다. 로미오가 사랑한 줄리엣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언젠가 파티에서 인식하게 된 구체적인 인물이다. 모르는 자는 결코 어떤 것을 욕심낼 수 없다.(I-II,27,2)


유사함(Similitudo)도 사랑의 원인이다. 따라서 ‘각자는 자기와 비슷한 것을 사랑한다’.(I-II,27,3)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또 하나의 자아(Alter Ego)’로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혜롭게 머리를 끄덕이며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거나 ‘완벽한 한 쌍’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유사함을 고려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들은 우리가 무엇이며 우리 마음속에서 무엇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다.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리라.”


사랑은 ‘상대방의 성공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선, 인식, 유사함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단순히 욕정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우정의 사랑으로 상승했는지를 검토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성공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홍수로 삶의 보금자리를 하룻밤 사이에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동정의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상대방의 성공을 기뻐하기는 쉽지 않다. 만일 자신이 성공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성공했을 때 과연 진심으로 상대방을 축하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서 참된 사랑이 기뻐해야 할 상대방의 ‘성공’이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성공,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었다고 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기뻐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상대방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돈이 상대방이 진실로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즉 기뻐해야 할 성공이란, 사랑받는 이가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자식이 선택한 길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그 부모가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여 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토마스는 이렇게 사랑의 원인과 결과를 철저하게 분석한 이후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의 원인”(I-II,28,6)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가 꿈꾸는 사랑과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실제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인다. 


오히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이 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는 ‘사랑이 낳는 결과란 무엇이며, 왜 사랑하는 이들이 종종 불행에 빠지게 되는가’를 검토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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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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