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자랑이라고 해야 할지 망설여지긴 하지만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나는 과거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지혜로 가득 찬 인간이라서 오늘만을 산다’기 보다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생에서 언제나 오늘이 어제보다 나쁜 날이 많았기에 과거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소 떼에게 몰리듯 불행에 쫓겨 다니는 형상이었으니 말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그땐 이래야 했어’라고 후회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 수많은 좋은 책을 붙들고 읽으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원칙들을 연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원칙은 세 가지인데 이러했다.
지금, 여기, 그리고 나 자신.
모든 현인의 말씀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오직 지금을 살고, 오직 지금만을 살 수 있을 뿐이며, 여기를 살고 오직 여기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네가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너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마음에 담고부터 삶이 훨씬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하는, 여러 가지 걱정들이 없다고는 못했다. 아마도 그건 대개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100세가 넘도록 잘 먹고 잘살 것이 확실히 있어"라고 할 용자가 있기나 할까 말이다. 게다가 뉴스를 보면 지구는 온난화의 위기 속에서 불타며 자전하고 있고, 전염병은 창궐하는데 소위 세상의 곳간에 있는 내 곡식단이 온전할 거라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그러던 중 지난여름 100일 동안 나는 우연히도 하루에 100단의 묵주를 봉헌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리했다. 100단을 바치는 일은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어서 대개는 눈을 뜨자마자 시작했고, 하루 종일 묵주를 지니고 다니며 다만 한단 씩이라도 나누어 바쳤다.
그때 내게는 특별히 소망하던 지향이 몇 가지 있었는데 사실 돌아보면 하나도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갑자기 신앙심이 폭발하듯 놀랍게 자란 것도 아니고 게으름도 여전했으며, 아이들은 승승장구하지 못했다. 집필은 진전되지 못했고, 하다못해 얼굴의 주름도 나날이 더 깊어졌다. 그래도 ‘결심했고, 약속드린 것’이니 싶어 100일을 채우고 지나갔다.
묵주 100단을 멈추고 가만히 되짚어 보니 내가 미래에 대한 근심을 전혀 하지 않고 지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는 이 말에 ‘100단 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웃기도 했지만, 아니다. 묵주기도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아니 나는 얼마나 분심 잔치를 벌이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 100일 동안 나는 ‘내일’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의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농담으로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고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다’라고 했는데, 몸으로 그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작가 C.S 루이스는 말했다.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이다. 불안은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온다.”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경영할 수도 없는 내일을 왜 나는 그토록 붙들어 놓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것보다 큰 유혹이 또 있을까…. 오늘 오직 오늘뿐, 나는 가고 있는 이 여름날의 오후를 내 마음에 새긴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