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입은 모독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큰소리를 지르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짐승의 입은 구약의 다니엘서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킬 때 사용한 작은 뿔이 지닌 ‘큰 입’과 같다.(다니 7,8.20 참조) 다니엘서의 ‘큰 입’은 하느님께 드리는 이스라엘의 제사를 금지시켰고 나아가 하느님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했다.(다니 7,25; 1마카 1,24; 다니 7,25; 11,36 참조) 요한 묵시록의 ‘큰 입’은 다니엘서의 ‘큰 입’과 같다.(묵시 13,5 참조)
요한 묵시록의 첫 번째 짐승의 입은 ‘주어져 있다’. 그리고 주어진 권한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다.(앞서 우리는 ‘마흔두 달’이란 시간이 기원전 2세기 중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주어졌다’라는 수동태 형식의 표현을 학자들은 ‘신적 수동태’라고 일컫는다. 짐승은 하느님을 거스르되, 자신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나 권능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 아래 놓인 것이고, 그러므로 첫 번째 짐승의 권한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 요한 묵시록은 짐승이 내뱉는 모독의 언사에 힘을 빼고 있다. 말은 있으되, 힘이 없는 말. 말의 크기는 거창하되, 그 실속은 너무나 하찮은 것이 첫 번째 짐승의 ‘큰 입’이다.
짐승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그분의 ‘거처’를 모독한다. ‘거처’로 번역한 그리스말은 ‘천막’으로도 번역되는 ‘스케네’(σκην?)이다. 요한 묵시록 7장 15절은 어좌에 계신 분이 십사만 사천의 ‘천막’이 되어주신다고 서술한다. 요한 묵시록 21장 3절은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거처는 천상이 아니라 이 땅, 이 삶의 자리다.
요한 묵시록은 이른바 ‘육화 사상’을 전제로 하느님을 생각한다. 육화하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은 하느님의 거처가 된다. 천상은 지상 안에 온전히 구현된다. 짐승이 하느님의 거처를 모독하는 건 하느님을, 동시에 그분의 백성과 이 세상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을 받는다.(묵시 13,7 참조) 다니엘서 7장 21절을 그대로 옮겨온 표현이고 요한 묵시록 12장 17절의 용을 그대로 모방한 표현이기도 하다. 신앙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처절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는 것이 짐승의 승리가 가리키는 바다. 많이들 경험하지 않는가, 신앙인은 참고 희생하고 그러므로 손해 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사실 예수님도 그러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세상에선 실패했다. 세상의 힘에 짓눌렸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성도들의 운명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 논리 앞에 신앙은 실패와 패배의 어리석음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1코린 1,21 참조) 땅의 주민들이 짐승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묵시 13,8 참조) 세상은 그렇게 힘이 있어 보이는 권력자에게 경배한다. 우리는 그것을 탓할 수 없다. 땅의 주민들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한다. 그들 ‘모두’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묵시 13,8 참조) 생명의 책과 관련해서 결과론적 해석이 난무한다. ‘착한 일’,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윤리 도덕적 지침의 실천 여부가 생명의 책에 기록될 가능성을 가늠한다.
절대적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는 조건이 된다면, 시대가 다르고 문화나 관습이 달라 어느 시대는 옳지만 다른 시대에는 허용하지 않는 상대적 규범들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명의 책이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선택에 따라 그 허용 범위가 달라지는 책으로 인식하는 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책을 인간 인식이나 행위의 수준에서 다루는 가벼운 생각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한계가 지워지고 익숙한 경험치에 의존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과 어린양의 생명의 책을 연계해서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영원하시고 초월적인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 모독하는 짐승의 입
거창하지만 실속은 하찮은 것
세상의 권력과 흐름 따르기보다 존재 성찰하며 하느님 뜻 찾아야
하여,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이것이다. “세상 창조 이래”라는 표현.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유일 때, 생명의 책은 세상 창조의 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보증하는 상징이 된다. 요한 묵시록은 3장 14절에서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 창조의 근원이라 밝혔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따른 결과론적 심판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한다. 생명의 책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고 그 갈망은 근원적이고 운명적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고, 존재함으로 생명의 책과 끊어내려야 낼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에.
그렇다면, 짐승을 따르고 경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 존재의 근본을 잊(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제 존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이리저리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떠넘겨버리는 일, 그것이 짐승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 사실 어린양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과 그분을 향한 경배로 불렸다.(묵시 5,6 참조) 이러한 구원의 섭리는 인간의 몇몇 행동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보다 더 강한 권능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만 구원을 받았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통해 구원을 지향하는 것, 그것은 무지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기 이전에, 제 인식의 수준과 넓이와 깊이가 부족함을 알고, 진정으로 저 자신이 무엇을 디디고 서 있는지를 아는, 자신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겠다. 그 공부의 끝에 하느님은 비로소 발견된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