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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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맺은 우정 160년 만에 재회하다

[안동교구 마원성지·본지 공동기획] 박해 속에서 피어난 우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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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영 신부와 칼레 신부·박상근 복자 후손과 크리옹 주민들이 미사를 마친 뒤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박해 시절 인연 맺은 선교사·신자
프랑스 크리옹서 두 집안 후손 상봉
세대를 넘는 신앙과 우정 이어져




“프랑스에 가면 칼레 신부님 후손을 꼭 찾아보아라. 만나지 못한다면 부디 그분들 사진이라도 구해 오려무나.”
1997년 여름, 경북 문경에서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막내아들 박태진(바오로)씨에게 아버지가 거듭 당부했다. 그는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WYD)에 참가하기 위해 김포국제공항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칼레(Calais) 신부는 1866년 병인박해때 살아남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였다. 본명은 니콜라(니콜라오) 아돌프 칼레, 한국 성은 강(姜)이다. 박해 당시 그는 문경 한실 교우촌에 숨어있다가 조선 신자들의 희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중 칼레 신부보다 4살 어린, 박태진씨의 조상이 있었다. 고조부의 동생인 박상근(마티아) 복자다. 문경 아전 출신으로 안동교구 유일한 복자이자 제2 수호 성인이다.

태진씨는 독실한 아버지 박시록(야고보)씨로부터 “우리 집안에 순교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1985년 함양 박씨 문중 산에서 발굴한 박상근 복자 유해를 문경 마원성지에 이장하는 현장에도 함께했다. 아버지 곁에서 힘겹게 조경석을 나른 그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칼레 신부 후손을 찾아달라는 부탁에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 담겼는지를.

하지만 낯선 나라에서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프랑스에서 오래 유학한 교구 사제 역시 후손 소재를 몰랐다. 결국 파리 WYD 참가 후 빈 손으로 돌아온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크게 낙심했다.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올해 여름, 태진씨는 다시 프랑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아내 이옥례(아녜스)씨와 누나 박현자(마르가리타)·현주(보나)씨와 함께. 이번엔 그토록 찾았던 칼레 신부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칼레 신부의 후손(형의 증손녀)인 마르틴씨가 프랑스에 도착한 박상근 복자의 후손 박현주씨를 포옹하고 있다.




복자와 사제의 160년 우정, 후손들이 잇다

이번 순례는 7월 15~25일 칼레 신부 삶의 궤적을 따라 진행됐다. 안동교구 마원성지와 한실성지(교우촌)를 담당하는 정도영 신부가 기획했다. 그에겐 벌써 칼레 신부 발자취를 좇는 네 번째 프랑스 방문이다.

순례 첫 행선지는 칼레 신부의 고향인 크리옹(Crion). 크리옹은 독일 국경과 가까운 동북부지방 로렌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이다. 인구는 100명 남짓에 불과하다. 칼레 신부는 1833년 이곳에서 농부이자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순례단은 대대로 크리옹에서 살고 있는 칼레 신부 후손을 만났다. 이번 순례 내내 동행할 칼레 신부의 형의 증손녀 마르틴씨와 남편 아메드씨다. 부부는 2023년 1월 정도영 신부를 처음 만났고, 지난해 5월 정 신부의 초대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박태진씨 등과 함께 조상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마원·한실성지를 순례했다. 이 역사적 상봉은 cpbc 특집 다큐멘터리 ‘160년을 이어온 우정, 깔래 신부와 복자 박상근’으로 제작됐다.(‘깔래’는 안동교구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본지는 외래어 표기법과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라 ‘칼레’라고 쓴다)

정 신부를 만나기 이전인 2017년에는 마르틴씨 부부도 딸을 한국으로 보냈었다. 칼레 신부가 사목한 교우촌과 순교자 후손을 찾고 싶었지만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마치 20년 전 박태진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엇갈렸던 두 후손의 길은 이제 하나로 이어졌다.

 

정도영 신부와 칼레 신부·박상근 복자 후손과 크리옹 주민들이 크리옹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세월이 지나도 서로 잊지 맙시다

칼레 신부의 고향에서 1년 만에 재회한 후손들은 힘껏 포옹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마르틴씨 부부의 집은 크리옹성당(낭시교구 소속)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목조 주택. 1881년경 마르틴씨의 증조부 도미니크 칼레(칼레 신부의 형) 대부터 살던 곳이다. 이곳이 칼레 신부가 태어난 집은 아니다. 생가는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지금은 남의 소유가 됐다. 대신 ‘한국 선교사 칼레 신부가 태어난 집’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부부의 집 안에는 칼레 신부와 관련한 자료를 모아놓은 공간이 있다. 가족에게 보낸 편지부터 사진, 관련 신문 기사까지. 수학선생이었던 마르틴씨가 꼼꼼하게 잘 정리해 놓았다.

7월 17일 크리옹에서의 뜻깊은 밤, 박태진씨는 마르틴씨 부부에게 특별한 선물을 전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글귀를 적은 한지 부채였다. 장무상망은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그림 ‘세한도(歲寒圖)’에 인장으로 찍은 글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김정희가 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됐을 때, 모두가 그를 외면한 가운데 제자 이상적만이 의리를 지켰다. 역관이었던 그는 북경에서도 희귀 서적을 구해 스승에게 보냈다. 이에 대한 김정희의 답례가 세한도였다. 박태진씨는 “김정희와 이상적처럼 칼레 신부와 박상근 복자의 후손도 대를 이어 연을 이어나가자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자신이 우리말로 쓴 뒤 불어로 번역한 편지를 전달했다. 또박또박 적힌 손글씨는 딸이 밤새 써내려간 작품이었다.

“칼레 신부님! 당신을 그토록 그리던,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박상근 마티아가 왔습니다. 낯선 한국의 문경 땅 백화산에서 헤어진 지 159년 만에 당신을 찾아 이곳 프랑스 크리옹에 왔습니다. 신부님께서 마티아의 후손인 저희를 이곳 크리옹에 불렀음을 느낍니다?.”

편지를 읽던 마르틴씨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끝내 다 읽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모습을 본 박상근 복자 후손들의 눈가 역시 촉촉했다.

 

정도영 신부와 칼레 신부·박상근 복자 후손과 크리옹 주민들이 미사를 마친 뒤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1760년경 지어진 낭시교구 크리옹성당. 수호 성인은 요한 세례자다.




 다시 이어지는 신앙과 우정

편지의 감동은 칼레 신부가 신앙 생활을 한 크리옹성당에서 한 번 더 재현됐다. 7월 20일 정도영 신부가 주례한 미사 중에서였다. 함께 참여한 크리옹 신자들도 환한 미소와 함께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환영했다. 오랜만에 공동체가 활기를 되찾은 순간이었다.

크리옹성당은 1760년경 지어졌다. 10대에 사제 성소를 발견한 칼레 신부는 이곳과 사제관을 드나들며 주임 드랑통(Deranton)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그리고 퐁타무송 소신학교에 이어 낭시 대신학교에 진학했다.

성당 안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제작된 고풍스러운 제대가 잘 보존돼 있었다. 요한 세례자(본당 수호 성인)를 비롯한 여러 성상도 눈에 들어왔다. 상주 사제가 없는 데다 신자 수가 줄어 한동안 크리옹성당은 먼지 쌓인 채 방치됐다. 지금은 칼레 신부의 후손 도미니크(마르틴씨의 오빠)씨가 한국에 다녀온 뒤로 날마다 청소해 깨끗하다.

미사를 마치고도 박태진씨는 한참 걸으며 회중석을 어루만졌다. “드디어 칼레 신부님의 손길이 닿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네요. 아버지가 오셨으면 저보다 더 좋아하셨을 텐데?.”

울먹이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아메드씨가 박태진씨를 꼭 안아줬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그들을 그렇게 온전히 감정을 나눴다.


박상근과 칼레 신부의 이별

159년 전 박해 시대 조선. 복자 박상근은 1866년 3월 15일경 한실 교우촌에 좁쌀을 사러 왔다가 칼레 신부를 문경읍내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교우촌보다 오히려 비신자가 많은 곳이 더 안전하리라는 칼레 신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곧 비신자에게 발각됐고, 칼레 신부는 백화산을 넘어 한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산길이 익숙지 않은 박상근은 탈진해 자꾸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칼레 신부는 박상근에게 “지쳤으니 마을로 찾아가 음식을 얻어먹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됐다면 신부님께선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할 곳이 없지 않습니까? 신부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함께 죽겠습니다.”

그 말에 가슴 아픈 칼레 신부였지만, 마음을 다잡고 “내 말에 순명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우는 박상근과 손을 맞잡고 눈물의 이별을 한 뒤, 홀로 길을 떠났다. 신자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계속 통곡했다. 칼레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한 뒤인 1867년 1월, 박상근은 배교를 거부하고 상주 진영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향년 30세였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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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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