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환대와 섬김의 정신으로 가난한 환자 무료로 돌보며 사랑 실천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3. 진료소와 시약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사진 1> ‘환자들이 모여 있는 덕원 진료소’, 1928?,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기초한 환대와 섬김

‘환대’와 ‘섬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의 모토이며,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평생을 수행해야 할 수도 규칙 중 하나다.

환대와 섬김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기초한다. 이웃, 특별히 가난한 이를 환대하고 섬기는 것은 단순한 윤리적 행위를 넘어 사랑으로 힘을 얻는 ‘덕’이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과 생활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로마 12―15장; 1코린 12―13장; 콜로 3―4장; 에페 4―5장)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로마 12,9-18)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에 기초한 이 복음적 권고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성덕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을 제시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병자들을 치유해주셨다. 그리고 딸과 오빠를 잃고 슬피 우는 가족을 위해 그들을 죽음에서 깨어나게 해주셨다.

섬김은 ‘굴종’이 아니라 상대를 ‘아끼는 것’이다. 아끼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섬김은 자발적 행위다. 겸손 없는 의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더욱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덕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과 이웃을 제 몸처럼 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섬김은 ‘자기 헌신’이다. 여기엔 ‘섬세한 배려’가 요구된다. 인간적 연민이나 물질적 이익 등 세부적인 것들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온전한 진정성만이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불안감이나 교만, 과시욕이나 지배욕으로 하는 일이 성덕으로 이끌 리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복음적 의미를 지니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언제나 더욱 일치시켜 주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어주며 살아가라는 과제가 있습니다”라고 권고한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8)

섬김은 ‘자기 봉헌’이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내어주는 선한 의로움이다. 이 자기 봉헌의 삶은 은총의 삶으로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다.

수도자들이 환대와 섬김의 삶을 수행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복음적 권고가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고백한다.(1요한 3,14) 더불어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이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한다.(1요한 4,20-21)
<사진 2> ‘아이를 치료하고 있는 요셉 그라하머 수사’, 1928?,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8년 가난한 이들 위한 덕원 진료소 마련

성경의 가르침과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 규칙」에 따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된 남녀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였다. 특히 그들이 진출할 당시 한국은 콜레라 등 여러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진료소와 시약소를 운영했다. 특히 덕원 수도원에 마련된 진료소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이 운영하던 시약소는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깊은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덕원 수도원 사랑채에 1927년 11월 진료소를 꾸민 다음 1928년 초 당국의 정식 인가를 받아 내과 질병과 외상을 치료하는 진료소를 열었다. 사랑채는 덕원 수도원을 찾아온 손님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이 덕원 수도원 진료소에는 매일 60명이 넘는 환자들이 찾아와 그라하머 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사진 1>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1911년 1월 23세 나이로 한국에 파견됐다. 서울 백동 수도원 문간 수사 소임과 숭공학교에서 재단 과목을 가르친 그는 강제 징집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의무병으로 제대하고 다시 한국에 온 그는 ‘간호 수사’로 병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의료 면허가 없던 그는 서울 국립병원장의 추천서를 통해 서울에서 온 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을 쳐 통과해 서울 행정 당국으로부터 1928년 의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서울 국립병원에 가서 마츠이 박사로부터 외과 수술 과정을 수련해 전문의에 버금가는 의술을 터득했다.

덕원 진료소는 약값을 낼 처지가 되는 환자에게는 원가만 받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상으로 제공했다. 주로 위장병 환자와 류머티즘·폐렴·늑막염 환자들이었다. 또 여름에는 말라리아와 티푸스 환자가 많았다.

그라하머 수사는 덕원 수도원이 북한 공산당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20년간 진료소를 운영했다. 그동안 그는 김재환 플라치도 수사를 비롯한 한국인 조수 몇 명을 고용했고, 진료소도 확장해 환자 대기실·진찰실·응급실·약국·방사선 치료실·수술실·입원실까지 갖추었다. 환자 대부분은 병원 문턱에도 갈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진료소는 늘 적자였다. <사진 2>
<사진 3> ‘원산 수녀원 시약소’, 1925,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원산·신고산·회령·청진에 무료 시약소 운영

“한국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려 고통받을 때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우리 수도원이 널리 알려지고 있고, 외교인들 사이에서 수도원의 명망과 수도원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있다. 요셉 수사의 의료 행위의 중요하고 궁극적인 목적은 외교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일이다. (?) 이들은 우리 진료소에서 치료와 보살핌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개종을 결심하게 되었다. (?) 외교인들은 가족 중 누가 병에 걸리면 여간해선 선교사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굿을 해도 안 되고 평범한 한국인 의사도 환자를 치료하지 못할 경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교사를 찾아온다. 이때 선교사는 의사이자 선교사라는 두 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요셉 수사는 건강을 되찾을 가망이 전혀 없는 환자를 완쾌시켰다. 그의 기도와 그가 지닌 하느님에 대한 큰 신뢰도 치료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진료소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고위 관리도 찾아온다.”(「분도통사」 535~536쪽)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은 1925년 원산에 진출하자마자 시약소를 열었다. <사진 3> 간호사 출신인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는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시약소가 국유화될 때까지 25년간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며 2000명이 넘는 어린이에게 대세를 주었다. 시약소는 주일과 축일을 제외하고 매일 문을 열었고, 하루 평균 50여 명의 극빈자를 치료했다. 툿찡 수녀들이 운영한 무료 시약소는 원산·신고산·회령·청진 네 군데였다. 툿찡 수녀들은 또 1941년 9월 함흥에 ‘성심 의원’을 개원해 의사 출신 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가 진료를 맡아 운영했다. 메페르트 수녀는 매일 밤 12시까지 진료를 했고, 그가 아침 식탁에서 수저를 든 채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모습은 흔한 일이었다.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한국인,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환대와 섬김은 늘 존경과 신뢰로 그리고 선교의 결실로 되돌아왔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9-0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9. 2

히브 12장 6절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