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 전 태어난 아기가 얼마나 쑥쑥 크고 있는지, 의료진에게 분주하게 설명하는 가예진(가명)씨의 모습이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소아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가씨의 아기 하진이(가명)가 앞으로 더 살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시간은 10개월 남짓. 선천적으로 관절이 굽고 담즙이 정체되는 등 100만 명당 한 명꼴로 발생하는 극희귀질환인 ARC 증후군을 앓고 있다.
이 사실을 가씨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지만, 하루하루 다른 아이들과 같이 커가는 아기를 보는 것이 삶의 기쁨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서울성모병원의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 ‘솔솔바람’이 함께하고 있다.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는 중증 질환을 가진 만 24세 이하 소아·청소년 환자와 그 가족이 치료 과정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을 돌보는 통합 의료 서비스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솔솔바람’이 회진 전 환아와 그 가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회의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 ‘솔솔바람’이 소아중환자실을 회진하며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소아·청소년에게도 완화의료를
정부가 2018년부터 시범 사업으로
서울성모병원 2020년부터 참여
현재 12개 병원에서 운영 중
솔솔바람
의료인·사회복지사·원목자 등 구성
환자의 신체적 증상 조절 비롯해
가족의 사회적·영적 어려움 살펴
현재 45명 환아 전인적 돌봄
환아들에게
아프고 힘들고 슬프기도 한 환아들
끝까지 응원하고 든든한 지킴이 역할
희망 잃지 않도록 독려
완화의료 필요한 환아 연간 13만여 명
솔솔바람 소아청소년과 이연희 교수는 “성인 환자와 달리 투병과 성장이라는 두 가지 과업을 모두 따라가야 하는 소아 환자는 내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놓인다”고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서울성모병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중증질환을 앓아 완화의료가 필요한 소아·청소년 수는 연간 13만여 명에 이른다. 이 중 1000여 명이 매년 하느님의 품에 안기고 있다.
이에 서울성모병원은 보건복지부가 2018년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라는 소아과학의 기본 철학을 반영해 시행한 ‘소아청소년을 위한 완화의료 시범사업’에 2020년 5월부터 참여해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 솔솔바람을 운영하고 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전담간호사·전담의료사회복지사와 같은 필수 인력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원목자 등으로 구성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은 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해 전국 12개 병원에서 운영 중이다.
대부분 암 환자가 대상인 성인 호스피스 완화의료와는 달리 소아·청소년은 질병의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의 신체적 증상을 적극적으로 조절하고 환자와 가족의 사회적·영적 어려움을 돕는 의료 서비스다. 2015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24세 이하 소아청소년 완화의료 대상질환 유병률 중 암 환자 비율은 26 정도. 나머지는 선천성 질환, 유전·대사 질환, 신경근육 질환, 퇴행성 질환 등 비암성 질환자인 것이 특징이다.
이에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는 일반적 호스피스 완화의료와는 달리 진단 병명이나 질병 단계에 제한 없이 의료진 돌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이용할 수 있다. 미술·음악·놀이 프로그램, 보호자를 위한 그룹 음악치료를 비롯해 각종 이벤트, 전문 상담 등이 제공된다.
환아 위한 ‘어벤저스’
“회진 왔어요!” 7월 어느 날, 서울성모병원 소아중환자실을 들어서는 솔솔바람의 뒷모습이 사뭇 든든하다. 아이들의 최근 건강 상태·관심사·습관, 심지어는 가정사까지 회의를 통해 막 나눈 참이었다. 환아 한 명 한 명을 대할 때 주의할 점은 없는지,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지 각자 분야에서 파악한 바를 공유했다. 마치 영화 속 영웅 공동체인 ‘어벤저스’가 절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처음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이 생긴 이후 매주 목요일이면 이렇듯 회의와 회진을 통해 380명의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현재는 45명의 환아를 돌보고 있다.
380명의 아이 중 이제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아이도 꽤 된다. 하지만 이들은 기대 여명과 관계없이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이들이 행복하게 지상 여정을 나들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이 교수는 “소아청소년과는 아이의 처음과 마지막을 다 보는 유일한 의사 직군”이라며 솔솔바람에 참여한 계기를 전했다. 그러나 필요하다 하더라도 돌보는 아이의 죽음을 반복해서 마주하는 상황은 쉽지 않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그저 ‘부르심’이 있는 것 같다”며 “제 스승님께서 저를 ‘착한 오지랖’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아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혹시 모를 마지막 순간도 탄생의 축하처럼 아름답게 보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명을 밝혔다.
‘솔솔바람’이 돌보는 솔솔이 아린(가명, 초4)양이 입원 중 라파엘 어린이학교를 통해 배운 패션 디자인 소묘를 기자에게 선보이고 있다.
편견 극복의 숙제
아직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에 대해 만연한 편견도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다. 최선희(헬레나) 전문간호사는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라고 하면,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때나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해야만 받을 수 있다고 편견을 가지신 분이 많다”며 “심적으로 힘든 환아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미성년자라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데, 아직 ‘우리 아이는 가족이 충분히 돌볼 수 있어요’ ‘찾아오는 것이 불편해요’ ‘저 아이는 솔솔바람이 찾아오는 걸 보니 중환자인가 봐’라는 오해와 편견의 시선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고 했다. 그래도 솔솔바람은 아이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밝고 명랑하게 쑥쑥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이를 보람 삼아 환아와 가족에게 오늘도 손을 먼저 뻗는다.
의료진과 아이들은 서로를 ‘솔솔이’라고 부른다. 이날도 퇴원했던 한 ‘솔솔이’가 찾아왔다. 의료진에게 직접 만든 팔찌를 선물하기 위해서다. 최 간호사는 “‘솔솔아~’라고 친구처럼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저도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좋다”고 미소 지었다. 솔솔이 아린(가명, 초4)양이 입원 중에 라파엘 어린이학교를 통해 배운 패션 디자인 소묘를 최 간호사에게 열심히 자랑하는 동안 이를 지켜보던 엄마 고민지(가명)씨가 문득 “존재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고씨는 “아이가 건강할 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거라곤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며 “아린이가 진단받고 어느 곳에도 기대지 못할 때, 솔솔바람이 먼저 손 내밀어 주신 것을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아이가 언젠가 다 나아 사회로 돌아갔을 때 다시 한 번 적응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만들어주셔서 고맙다”고도 했다.
사회로 돌아갈 환아들에 대한 전인적 돌봄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의 목표는 언젠가 사회로 돌아갈 소아 환자들이 잘 적응해나갈 수 있도록 전인적으로 돌보는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유재현(심플리치오) 교수는 “아이가 아프면 가정은 재난에 가까운 상황이 된다”며 “누구나 재난 상황이 닥치면 긴장도 높아지고, 평소엔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일조차 어찌할 줄 모르게 되기에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돌봄이란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이 한 조각 있고 진심을 담아 그것을 잘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환아와 가족을 대할 때 이들의 사정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여기면서 진심으로 아이가 낫기를 함께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솔솔바람은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지금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아프고 힘들 때 화나고 슬프기도 하지만 솔솔이가 너희 곁에 있어.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 선생님들과 신부·수녀님이 치료받는 동안 옆에서 응원과 함께 든든히 지켜줄 거야. 비가 온 뒤에는 늘 예쁜 무지개가 뜬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