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난 앞에 아파하지 않는 신과 종교들과 사람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은 부족하기만 하지만, 그나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여정에서 잉태되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 명예로운 사람들은 고통의 여정에 동반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면서 고통의 십자가 여정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확고한 믿음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견디어 내었을 때에만 가능한 길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도전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인간에게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대답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도 십자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고통의 여정을 넘어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조우할 수 있습니다. 그 여정에서 상처받고, 부수어지고 절망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십자가의 밤을 지나지 않고, 어둠을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고난받는 사람들을 안아줄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는 고난받지 않은 신앙은 사변적 논리와 이데올로기와 일방적 가르침, 독선으로 신앙을 강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모든 사람을 예수 자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러므로 세상에서 고난받은 사람들의 모든 아픔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입니다. 세상의 처참한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이 들더라도 세상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순간에 하느님을 찾고,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분노하고 절망하여 결국에는 하느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부재의 어두운 밤을 지독하게 체험하지 않고는 신앙이 추구하는 사랑에 관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하느님의 침묵을 통한 어두운 밤의 체험으로 얻어집니다. 나 자신도 침묵으로 숨어 계신 하느님 부재의 느낌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어두운 밤을 인내하고 건너가야 합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시련을 통해 성숙으로 이끕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다리는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을 기도드리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는 주술적 하느님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신앙의 무대 뒤에 숨어 하느님께 세속적 갈망을 투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상처와 세상의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수난받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통해 그들의 병을 치유하시고 연민으로 위로하셨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고통받는 이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모두 고통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삶의 바다를 나가기 전에 던져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영수(루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