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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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심판을 은총과 평화의 땅으로 바꾼 마리아 라흐 수도원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41. 독일 마리아 라흐 베네딕도회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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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팔츠 글레에스 마을의 마리아 라흐 베네딕도회 수도원. 1093년 하인리히 2세 백작과 부인 아델하이트에 의해 설립한 수도원으로 현재 약 40명의 수도자가 출판사·양조장·과수원과 정원·피정의 집·호텔과 레스토랑·서점과 공방을 운영하며 기도와 노동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일대는 1만 3000년 전까지 대규모 분화가 있었는데, 수도원 옆 라흐호도 그 화산활동의 결과물이다. 직경 2㎞, 둘레 약 8㎞에 달한다. 출처=셔터스톡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코블렌츠에서 서쪽으로 20여 분 차로 달려가면 어느 순간 풍경이 바뀝니다. 라인강 유역의 너른 계곡과 성채가 어우러진 도시 풍경은 서서히 사라지고, 울창한 숲과 검은 현무암 바위가 드러납니다.

이곳은 알프스 이북에서 보기 드문 화산지대로 고대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아이펠(Eifel) 고원이 넓게 펼쳐져 있지요. 수십 개의 둥근 화산호와 작은 분화구 언덕이 흩어져 있어 제주도의 오름을 연상시킵니다. 차이점은 우리 원형 분화구는 물이 차있지 않은 건식이라는 점이겠죠. 이곳 화산호 중 둘레 약 8㎞에 달하는 라흐 호수가 있는데 독일 최대 칼데라호입니다. 그 호숫가에 오늘 가볼 천 년의 마리아 라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라흐(Laach)’가 ‘호수’란 뜻이니 호숫가 성모님의 수도원인 셈이죠.
로마네스크 양식을 간직한 마리아 라흐 수도원 성당 본랑. 내부 기둥에 부분적으로 옛 로마네스크 성당의 프레스코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옛날 성 십자가 조각을 모셨던 성유물함(우측 하단)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는 기둥 옆에 성유물함을 설치해 순례자들이 가까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기다림과 회개의 장소

중세 순례자에게 마리아 라흐 수도원은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회개하는 장소였습니다. 라흐호는 화산 활동으로 생겼기에 지금도 수도원 근처 수면에서 작은 거품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질학적 지식이 없던 중세 사람들은 이를 하느님의 신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호수 아래 거대한 불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때 천지를 개벽하던 불길이 하느님의 뜻으로 고요히 호수 아래에 갇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보글거리는 거품은 그 불길이 여전히 살아있는 증거이고,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면 다시 깨어나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성유물이 있는 쾰른 대성당이나 트리어 대성당을 찾아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현세의 삶과 내세를 묵상하곤 했습니다. 배로는 모젤강과 라인강이 만나는 코블렌츠에서 라인강을 타고 내려와 안데르나흐에서 도보나 마차로 왔지요. 요즘도 매년 수십만 명이 이곳을 다녀갑니다. 보통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으로 오갈 때 들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호수 가까이 다가가면 화산암으로 지어진 작은 마을과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부터 호수로 향하는 길은 점차 숲으로 접어듭니다. 울창한 숲 사이로 호숫가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수도원의 육중한 실루엣이 나타나지요.
동쪽 주 제단의 제대와 천장 프레스코화. 육각형 천개가 있는 주 제대는 13세기 후반 설립자 하인리히 2세의 무덤 위에 세워졌던 구조물인데, 17세기 후반 이후 여러 차례 위치가 바뀌다가, 1947년 현재의 주제대로 옮겨져 설치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그린 천장 프레스코화는 1911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기부로 완성됐다.

호숫가 성모님의 집

마리아 라흐 수도원은 1093년 궁정백이던 하인리히 2세 백작과 부인 아델하이트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하인리히는 라인강 유역을 지배한 강력한 영주였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세우고 자기 영지 일부를 기부해 수도원에 자기 가문의 영속을 맡기고자 했지요.

전승에 따르면, 하인리히 백작은 수도원 터를 찾기 위해 기도하던 중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호숫가 숲에 집을 세우라고 계시했다고 합니다. 장소를 물색하러 말을 타고 호숫가를 돌던 중 호수 남서쪽에 말이 멈춰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가 하느님이 택한 자리라 믿어 지금의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수도원은 곧 신성로마제국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고, 지역 교회와 농업·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수도원 연보와 후대 문헌에는 하인리히 백작의 장례에 얽힌 전설도 있습니다. 장례 행렬이 수도원으로 향할 때 갑자기 말을 탄 기사가 나타나 관 곁을 호위하다가 장례가 끝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천사이며 하느님이 이곳을 보호하신다고 믿었지요.
라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마리아 라흐 수도원 성당과 파라다이스 현관(1225~1230). 쾰른·본· 트리어·마인츠 등 대주교좌가 밀집한 곳으로, 선제후들이 경쟁적으로 대성당을 세운 결과 ‘라인 로마네스크’라는 양식이 탄생했다. 4개 때로는 6개의 탑을 세워 수직성과 대칭성을 강조하고, 동쪽뿐 아니라 서쪽에도 제단이 있어서 두 그룹이 함께 전례할 수 있는 구조가 특징이다. 마리아 라흐 수도원 성당은 총 6개의 탑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예수회 도서관(1862)과 필사본. 1802년 수도원이 해산된 뒤 잠시 예수회가 인수한 시기(1862~1873)에 세워진 도서관이다. 베네딕도회의 전례·영성 전통과 예수회 대학도서관식 학문·교육 중심 장서 구성이 결합된 혼합형 도서관이다.

하늘을 향해 뻗은 구원의 장소

마리아 라흐 수도원 성당은 수도원 설립 직후인 11세기 말 착공되어 약 1156년에 봉헌되었습니다. 첫인상은 수도원 단지 규모에 걸맞게 압도란 단어부터 생각나는데요. 동쪽과 서쪽에 각각 쌍탑을 세우고, 중앙에는 팔각형의 거대한 탑을 올린 육중한 대칭 구조입니다. 여섯 개의 탑이 마치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솟아올라 있습니다. 이런 웅장한 모습에 마리아 라흐 수도원 성당은 독일 ‘라인 로마네스크’ 성당의 백미로 꼽힙니다. 이 양식은 11~13세기 라인 지방 선제후들의 경쟁 덕분에 탄생한 독일 특유의 성당 건축 양식이죠.

수도원 성당 서쪽 현관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둥과 세 개의 큰 아치가 숲의 나무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후기 로마네스크와 초기 고딕이 섞인 과도기적 양식으로 성당 본당 건축이 끝난 뒤인 약 1225~1230년에 덧붙여졌습니다. 중세에는 성당에 들어서기 전 이 공간을 파라다이스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낙원에 들어가기 직전의 마당’이라 붙은 이름이지요.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 개의 신랑이 길게 뻗어 있고, 굵직한 원형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일부 원형 기둥에 남아 있는 모자이크와 채색 장식이 옛날 이곳 성당 전체가 색채와 상징으로 가득했음을 보여줍니다. 시선은 13세기에 제작된 천개가 있는 주 제대에서 멈춥니다. 단순한 돌 제단 위에는 십자가와 촛대가 놓여있고, 그 뒤편에는 수도원 설립자 부부의 무덤이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수도원 이름처럼 성모님께 봉헌된 화려한 바로크 제대가 있었지만, 1802년에 수도원이 폐쇄되며 해체되었다가 1892년에 베네딕도회가 재건할 때 기존 제대 대신 원래 로마네스크 정신을 되살리고자 지금의 주 제대를 만들었습니다.

수도원 주차장 바로 옆에 라흐 호수가 펼쳐집니다. 중세 순례자들은 호수를 보며 불길과 심판의 상징이던 이 땅이 성모님의 도움으로 은총과 평화의 장소로 바뀌었음을 느끼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순례 팁>

※ 코블렌츠에서 자동차로 30분(20㎞). 열차 이용은 안데르나흐 역에서 하차(15분 소요) 후 지역 버스 이용(No.395, 수도원 주차장 하차)

※ 수도원 전례 : 주일과 대축일 07:15· 09:00·11:00, 평일 07:30(성모 승천 대축일은 10:00) 그 외 네 차례 시간 기도가 있다. 수도원 가이드투어(화~토 15:00, 수도원 정문). 수도원 도서관, 수도원에서 만든 공예품과 식품, 라흐 호숫물로 만든 수도원 맥주!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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