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도 예수님의 어려운 당부가 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고 하신 말씀은 험난함의 끝판왕이다. 이는 아직도 논쟁이 끝나지 않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난제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교회의 사유 재산을 두고 양립하는 베네딕토와 프란치스코 교단의 갈등에서부터, 인간 본성을 신의 영역에서 인정하는가에 대한 신학사의 큰 줄기까지 섬세하게 풀어냈다.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프란치스코 학파의 수도승 윌리암스도 베네딕토 학파 수도원장의 융숭한 대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의 본성은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느껴진다.
자기 소유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이전 교회의 기능이 현재의 자치구 혹은 정부에 준하기 때문에 비용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면 교회 소유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재산이 있어야 오히려 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연명할 수 있게 한다는 구제 논리도 갖고 있다.
반면 무소유를 외치는 이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주님의 제자이자 자녀인 우리의 의무요 권리라고 주장한다. 사유 재산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다시 반박당한다. 주님은 개인이 소유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한 몸인 교회의 재산은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쳇바퀴 같이 끊임없는 논리대결이다.
연주자, 특히 현악주자는 뛰어난 연주자일수록 자신의 악기를 소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웬 엉뚱한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놀랍게도 엄연한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현악기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명품 악기 중에서도 말석에 위치하는 아마티의 경우 1980년대 말에 약 2만~3만 달러에 거래되었다. 현재는 최소 100만 달러(한화 약 14억 원)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이 악기를 소유할 수 없다. 2000년대 초 최상품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가격은 약 4백만 파운드, 한화 80억 원 정도였다. 당시에도 거품 낀 가격이라고 사람들이 경악했지만, 지금 이 악기의 정확한 가격은 추정조차 힘들다.
아마티의 첼로 ‘The King’은 이미 연주용이 아니라 소장용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들 악기는 은행이나 기업·거부들에 의해 수집되었고 한번 수집된 악기들은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다. 몇몇 걸출한 연주자만이 이들의 후원으로 악기를 대여해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데, 적어도 최상급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해야 하며, 어마어마한 보험료를 지불해야 한다.
잘하는 연주자일수록 좋은 악기를 쓰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르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고 해도 이런 어마어마한 가격의 악기를 개인이 소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싼 악기가 과연 이 정도의 가격을 감당할 만큼의 성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잘할수록 무소유가 되는 현실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그래서 음악가들을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라고 하나보다.
베토벤 교향곡 7번 4악장을 일부 단원이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한 영상
//youtu.be/FG6B1bMEYfs?si=z6B6VsnbEOBqifS-
작곡가 류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