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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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떠났어도 내 영혼은 조선에…

병인박해 중 가까스로 중국으로 피신이후 재입국 시도했으나 건강 악화돼말년까지 조선 교회 위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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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찾은 정도영(안동교구) 신부와 칼레 신부·박상근(마티아) 복자 후손들이 165년 전 칼레 신부가 조선으로 파견된 주님 공현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성인들. 아래 2열이 한국 순교 성인 10위다. 기해박해 순교자 3위(앵베르 주교, 모방·샤스탕 신부)와 병인박해 순교자 7위(베르뇌·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드 브르트니에르·도리·볼리외·위앵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순교자 약 200명 가운데 23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영원한 조선 선교사’ 칼레 신부

“저는 제게 맡겨진 귀한 조선을 더없이 사랑합니다. 이 땅이 하느님 자녀가 되기 위해 제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겠습니다.”

꿈에 그리던 선교지 조선에 도착한 지 6개월이 된 1861년 10월 30일, 칼레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약 24㎞ 떨어진 손골(경기 용인) 교우촌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고 있었다. 사제수품 2년 차인 젊은 선교사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채 알기도 전에 사랑하게 됐다.

5년 뒤 병인박해로 아버지 같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그리고 동료 사제 7명을 잃었지만, 그 사랑은 변함없었다. 이 땅에 남은 사제를 지키려는 교우들의 눈물겨운 희생으로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피신한 칼레 신부. 그는 조선에 돌아갈 방법을 찾으러 만주로 향했고, 2년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전력으로 재입국을 시도한다. 하지만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다 건강이 위중한 상태가 됐다. 원체 병약한 데다 험난한 도피 생활로 이미 몸이 크게 상한 까닭이었다.

주변의 간곡한 만류에 고국 프랑스로 돌아간 칼레 신부는 관상 수도회인 엄률 시토회(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한다. 자신을 희생 제물 삼아 오로지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살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고 프랑스 남부 모벡 수도원에서 51세로 선종하기까지. 칼레 신부는 그렇게 손골에서 한 약속을 지켰다.

‘영원한 조선 선교사’가 희망으로 가득 차 복음 전파와 순교의 꿈을 키우고, 몸과 영혼을 단련하던 곳.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칼레 신부와 복자 박상근(마티아) 복자 후손들이 갔다.

 
1838년 베트남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보리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보리 신부는 옥중에서 자신이 2년 전 서통킹대목구(현 하노이교구)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유해는 1843년 신학교로 돌아와 '순교자의 방'이 조성되는 계기가 된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 오기 전 만주에서 사목할 때 입었던 푸른색 중국 옷과 만주대목구 부대목구장 때 사용한 목장.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되다

360년 역사 동안 4000명이 넘는 교황 파견 선교 사제를 파견한 ‘사도들의 양성소’ 파리외방전교회. 그 본부 위치는 파리 7구의 뤼 뒤 박(rue du Bac) 128번지다. 뤼 뒤 박은 ‘나룻배(Bac) 길’이란 뜻인데, 과거 파리 도심을 흐르는 센강 나루터로 이어져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는 1663년부터 1960년까지 300년간 운영된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건물이 있다. 오늘날도 파리에서 유학하는 아시아 출신 사제 숙소 등으로 쓰이며 전교회와 선교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1858년 7월 23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칼레 신부도 대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860년 6월 2일 생 쉴피스(성 술피치오) 성당에서 파리대교구장 모를로 추기경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3주 뒤 선교지가 발표됐다. 조선, 순교자의 땅으로 불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다. 조선으로 발령된 선교사는 한 명 더 있었다. 낭트교구 출신 리델 신부다. 훗날 그는 칼레 신부와 함께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아 만주에서 사목하던 중 제6대 조선대목구장 주교가 된다.

조선은 전교회가 맡은 아시아 여러 선교지 중에서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었다. 그야말로 회원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교회였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 입국은 실패했지만,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과 함께 임명된 초대 대목구장이 바로 회원인 브뤼기에르 주교였다. 목자 잃은 가엾은 양 떼를 위해 모두가 위험하다고 마다하는 조선 선교를 자원한 인물이다.

그 의지를 이어 모방·샤스탕 신부와 제2대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차례로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세 선교사는 서양인 최초로 이 땅에서 사목하다 1839년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첫 한국인 사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다는 사실도 유명한 일화였다. 이 4명의 사제는 1857년 가경자로 선포돼 존경받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출발’ 1868년 샤를 드 쿠베르탱 작. 제단에 선 조선 선교사 4명 중 맨 왼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위앵 신부다. 그 옆 작곡가 구노와 포옹하는 이는 볼리외 신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인물은 도리 신부다. 맨 오른쪽 주아브(알제리풍 보병)와 악수하는 사제는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다.

순교자의 땅 조선으로 파견

칼레 신부를 비롯한 새 선교사들은 출발을 앞두고 십자가를 든 채 사진을 찍었다. 1850년 기록과 홍보를 위해 시작한 관행이었다. 칼레·리델 신부가 동료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 2장 있다.

대망의 출발일인 1860년 7월 25일 저녁, 선교사 파견 예식이 거행됐다. 1962년까지 지속한 전교회 전통이다. 정원에 있는 순교자들의 모후 경당에서 시작해 파리외방전교회 성당에서 마무리되는 순서였다. 17세기 지은 성당 이름은 현재 ‘주님 공현 성당’이지만, 칼레 신부 때는 아시아 선교 개척자에서 따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이라 불렀다.

순례단은 성당에서 칼레 신부를 포함해 여러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바쳤다. 아울러 이미 세상을 떠난 사도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파견 예식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선교사들이 친구(親口,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입맞춤)를 받는 순간이었다. 이들이 성당 제단 앞으로 나오자 지도 신부와 신학생·가족 등 남성 신자들이 새 전령의 발에 입을 맞췄다. 그중에는 칼레 신부의 고향인 크리옹본당 주임 드랑통 신부도 있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후배들은 먼저 떠나는 선교사들을 부러움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일부 신자들은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생각에 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들이 걷는 길이 순교로도 이어졌기에.

마지막으로 성가대가 ‘선교사들의 출발 노래’를 합창했다. 1852년 4월 29일 파견 예식에서 처음 불린 노래다. 전교회 성당 전속 오르간 연주자였던 구노가 작곡하고, 달레 신부가 작사했다. 달레 신부는 한국 교회와도 인연이 있는데, 그는 다블뤼 주교가 모은 자료를 토대로 1874년 「한국천주교회사」를 펴냈다. 다블뤼 주교가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한 이후로는 생존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참고했다. 그중 칼레 신부가 작성한 것이 가장 자세하고 방대하다.

지금도 주님 공현 성당 왼쪽 벽면에는 파견 예식 그림이 걸려 있다. 샤를 드 쿠베르탱 남작의 1868년 작품인 ‘선교사들의 출발’이다. 칼레 신부보다 4년 뒤인 1864년 조선으로 파견된 사제 4명이 주인공이다. 드 브르트니에르·도리·볼리외·위앵 신부다. 이들이 조선에 도착한 지 1년도 안 돼 병인박해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쿠베르탱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예식에 참석하지 않았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도 포함했다. 1863년 태어난 화가의 아들,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도 어린이로 표현했다.

파견 예식을 마치면 이제 기차를 타고 항구에 갈 차례다. 새 선교사를 역까지 태울 승합 마차(Omnibus)가 대기 중이었다. 칼레 신부와 리델 신부는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기로 했다.



선교사들의 얼이 서린 순교자의 방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주님 공현 성당 지하에는 ‘순교자의 방(Salle des Martyrs)’이 있다. 선교지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과 현지인 신자들의 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고문 도구와 토속적인 화풍의 순교화도 볼 수 있다.

순교자의 방은 1843년 한 순교자의 유해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1830년 통킹(베트남 북부)에 파견된 피에르 뒤물랭 보리(Borie) 신부였다. 1838년 체포된 보리 신부는 11월 2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떠난 지 13년 만에 시신으로, 그가 목에 채운 칼(형틀)과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유해는 진위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신학교 2층 작은 방에 놓였다. 신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그 방을 찾아 유해를 참배하며 순교 신심을 길렀다. 곧이어 다른 나라에서 순교한 이들의 유해와 유품도 그 옆에 차곡차곡 놓이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순교자를 기념하는 공간이 됐다.

칼레 신부 역시 순교자의 방을 드나들며 선교 열정을 불태웠다. 당시 조선 관련 유품으로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김대건 신부가 쓴 자필 편지가 있었다. 전문은 1865년 발행된 안내 책자에 수록됐다. 저자는 그림 ‘선교사들의 출발’의 주인공, 훗날 역시 조선에서 순교하는 볼리외 신부다.

1867년 칼레 신부도 순교한 동료들의 유품을 순교자의 방으로 보냈다. 프티니콜라 신부가 지녔던 조선 칼과 베르뇌 주교가 모든 신자에게 조선말로 쓴 편지였다. 2000년대에 지금 자리로 이전해 재단장한 순교자관에서도 베르뇌 주교 유품을 볼 수 있다. 조선에 오기 전 만주에서 사용한 물건인 중국 옷과 목장이다. 1898년 당시 만주대목구장 기용 주교가 기증한 목장은 사연이 있다.

원래 베르뇌 주교는 1854년 12월 27일 만주대목구 부대목구장(계승권을 지닌 보좌 주교)으로 주교품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서품식 사흘 전, 그를 조선대목구장에 임명한다는 8월 5일자 교황 소칙서가 도착했다. 전년에 선종한 전임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이미 그를 후임자로 지명한 까닭이었다. 고심 끝에 베르뇌 주교는 조선으로 떠났고, 11년간 양 떼를 살뜰히 보살핀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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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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