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간인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며 큰 착각일 뿐이다. 에고(거짓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누구도 완전 무구할 수 없다. 온갖 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 노력의 일환이 바로 자신이 범한 죄를 늘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야고 4,9)
슬픔의 길
사막 교부들은 한결같이 수도승은 자기 죄에 대해서 슬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암자에 앉아 당신 죄에 대해 우십시오.”(대大마카리우스 2)라고 말한다. 또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자기 죄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묻자 포이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죄를 대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눈물로 죄를 대속하고, 덕을 얻고 싶은 사람은 눈물로 그것을 얻습니다. 우는 것은 성경과 교부들이 ‘우시오!’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남겨준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포이멘 119)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계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 중에 언제나 눈물을 받기 위해 가슴받이를 착용했어야 할 정도라고 전해진다.
일부 예외는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수도승은 바르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의 항구한 접촉으로 인해 그들의 양심은 더욱 순수하고 섬세해졌다. 그 결과 그들은 인간적 연약함으로 짓게 되는 죄가 아무리 작아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압바 마토에스는 말했다.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만큼 더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마토에스 2) 실제 우리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닦으면 닦을수록 우리 자신의 티와 허물이 더 자세히 비추어진다. 마음에 때가 껴서 흐려질수록 양심도 무뎌지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닦아 순수하게 될수록 우리 양심도 더욱 섬세해질 것이다.
상이한 참회 방식
죄에 대한 사막 교부들의 생각은 정확히 같지 않고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참회하는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일례로 결혼하기 위해 사막을 떠난 두 명의 형제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후에 그들은 후회했고 교부들은 그들에게 동일한 보속을 주었는데, 곧 일 년 동안 은둔해서 빵과 물로만 엄격히 생활하는 것이었다. 일 년이 끝나갈 무렵, 한 사람은 창백하고 우울해하였고, 다른 사람은 행복하고 즐거워했다.
전자는 자기 잘못과 자기 몫으로 주어진 형벌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으로 일 년을 보냈고, 후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불순함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분께 대한 생각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익명의 교부 186) 두 경우 모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참회 방식이다.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렇듯 상이한 참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 따른 결과 역시 상이하다. 이는 죄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필자의 견해로는 두 번째 사람의 경우에 더 마음이 끌린다.
영적인 슬픔
슬픔, 탄식, 통회의 뜻을 지닌 그리스어 펜토스(p?nthos)가 있는데, 이는 절망과 좌절을 초래하는 자연적 슬픔과 다른 영적 슬픔이다. 압바 모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얻기 어려운 덕이 세 가지 있습니다. 항상 울며 슬퍼하는 것, 자기 잘못을 언제나 기억하는 것, 그리고 매 순간 자기 눈앞에 죽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영적 슬픔 역시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비롯된다. 곧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는 갈망, 악에서 해방되려는 갈망, 완전함에 대한 갈망,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 하느님께 대한 갈망 등이다. 이 슬픔의 경우에는 여전히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언젠가는 나에게 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리라 믿는다.
따라서 영적 슬픔은 고뇌가 없는 희망으로 가득 찬 슬픔이다. 이것이 바로 사막 교부들이 말하는 슬픔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는 갈망에서 울며 슬퍼했다. 또한 자기 죄와 타인의 죄에도 슬퍼했고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도 울었다. 눈물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시적 눈물 흘림이 아닌 마음 상태다. 사막 교부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은 마음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눈물의 열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 맞는 말이다. 눈물 없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반드시 어떤 열매를 맺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열매를 맺게 된다. 그 열매란 과연 무엇인가?
첫째, 눈물은 몸을 정화한다. 사막 교부들은 “높은 곳에서 오는 눈물은 몸을 정화시키고 거룩하게 한다”고 말한다. 둘째, 눈물은 죄를 쫓는다. 압바 롱기누스는 기도와 시편 중에 큰 통회를 체험하였다. 어느 날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압바, 수도승이 기도 중에 우는 것이 영성생활의 법규입니까?”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바로 천사들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에 떨어졌으므로 울 필요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서는 울 필요도 없습니다.”(교부들의 금언, 작자 미상)
셋째, 눈물은 악마와 싸우는 무기가 된다. 압바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그대 마음에 엉뚱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기도하려 하지 말고 눈물의 검을 갈으십시오.” 넷째, 눈물은 기도를 낳는다. 압바 파울루스가 말했다. “진창 속에 목까지 빠져 있는 나는 하느님 앞에 울며 말합니다.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대大파울루스 2)
끝으로 눈물은 기쁨을 준다. 암마 신클레티카는 말한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엄청나게 많은 싸움과 아주 많은 고통이 따르지만 후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옵니다.”(신클레티카 1)
모세 압바의 말대로 우리가 늘 자기 잘못을 기억하고 울며 슬퍼하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산다면, 우리의 슬픔과 눈물, 탄식은 열매를 맺고 마침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우리의 영적인 슬픔도 커질 것이다. 엄위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은 너무도 큰 여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