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4~1546)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 형제의 조카이고,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아들인 조각가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와는 사촌지간이 됩니다.
그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1503년 삼촌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손에 이끌려 로마로 가서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에 들어갔고,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현장에서 1514년까지 브라만테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브라만테 이후 라파엘로 밑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빌라 파르마의 공사에 참여하였고, 라파엘로가 사망한 1520년 이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공사의 총감독이 되어 설계를 진행하였으며, 이때 같은 공방 출신의 페루치가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율리오 2세 교황 시기였는데 그 후로 세 명의 교황, 곧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와 친분을 쌓았고 그들이 발주하는 건축 공사를 수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들이 대체로 칭찬을 아끼는 편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지성인이나 예술가들이 보였던 만능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고, 조르조 바사리도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서 그가 천재성으로 전인적 예술을 추구하는 당대의 예술가와는 다르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미술 분야에는 관심이 적었고 건축에 집중한 편이었으며, 건축에서도 독창성과 창조성을 요구하는 분야보다는 시공이나 기술적인 분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교황들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수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향 피렌체에서부터 가족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삼촌들로부터 건축을 배웠고, 그 덕에 어린 나이임에도 삼촌들의 유명세를 업고 브라만테의 로마 공방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라파엘로 산치오와 발다사레 페루치 그리고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 자코포 산소비노, 미켈레 산미켈리, 줄리오 로마노 등과 교류하였습니다. 그는 1527년 로마 대약탈 때도 다른 건축가들과 달리 로마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로마에서 영향력 있는 건축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수주한 공사는 성채와 같은 군사시설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군사시설이 작품성보다 견고한 시공을 요구했고, 마침 그 시기에 ‘이탈리아 전쟁’이 한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군사시설 외에도 팔라초(궁전) 건축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대의 팔라초를 연구하여 팔라초의 유형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그의 팔라초 유형 연구는 건축에 대한 관점을 예술성만이 아니라 실용성에까지 확장하여 주었습니다. 그의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사무소의 운영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후대는 그를 근대 설계사무소의 효시라고 말합니다. 그는 결국 건축을 시스템으로 이해한 최초의 건축가인 셈입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초기 작품 중에 ‘팔라초 발다시니(Palazzo Baldassini)가 그러한 ‘유형주의’의 한 예입니다. 유형이란 ‘건축물의 기능’에 의거한 어떤 경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예를 들어 특정 성향의 대규모 건물을 설계할 때, 그런 건물의 설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건축가들이 건물의 대표적인 유형에 따라서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실용성에 바탕을 둔 방식입니다. 이런 유형적 접근 방식은 군사시설에 유용하였지만, 그는 팔라초 발다시니에서 그런 시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팔라초에 대해 전문가들은, 브라만테 밑에서 함께 있었던 페루치에 비해 육중한 면은 있지만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동시대에 미켈란젤로에 의해서도 내려진 바 있는데, 비록 팔라초 발다시니가 예술성은 떨어지나 팔라초의 한 유형으로 정착하여, 18세기까지 상류층의 주거지로 가장 인기 있는 유형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에게 군사 건축물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팔라초 파르네세(Palazzo Farnese)’일 것입니다. 훗날 바오로 3세 교황이 된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은 그에게 파르네세 가문을 위한 궁전을 의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공사가 느리게 진행되었는데, 추기경이 1534년 교황 자리에 오르면서 건물의 평면이 확장되고 전체적으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습니다.
팔라초 파르네세는 출입구가 있는 정면의 높이가 30미터에 폭도 60미터가 넘고 건물의 깊이도 80미터에 이릅니다. 평면은 중앙에 있는 정사각형의 중정을 중심으로 각 실이 배치된 형태입니다. 건물의 뒤편이 테베레강인데 그곳에 거대한 로지아가 있습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팔라초의 각 층을 코니스와 창문을 둘러싼 원기둥의 기단 상부를 가로지르는 석조 띠로 구분하였습니다.
출입구를 지나서 팔라초에 들어가면 중정에 원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고전주의적 경향이 드러난 곳으로 마르첼로 극장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것입니다. 중정의 지상층과 1층은 아케이드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2층은 매우 세련된 설계의 창문들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모든 층을 아케이드로 구성하여 층마다 오더를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으로 설계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면의 코니스 설계가 공모에 부쳐졌고 미켈란젤로가 당선되면서 미켈란젤로는 팔라초 파사드에 자신의 디자인을 넣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코니스를 고전 형식으로 설계하였는데 건물의 제일 위층이 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원래 설계보다 더 높이 올려서 계획하였습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지 않는 이러한 설계는 미켈란젤로의 매너리즘 경향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정의 2층 전체와 1층의 이오니아식 오더 위로 고전에 어긋나는 프리즈를 계획하고 아치 안에 창틀을 넣은 것도 미켈란젤로의 설계일 것입니다.
비록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과 ‘팔라초 파르네세’에 대한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설계에 만족하지 않고 외관의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지만, 두 건물 모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흔적을 담고 있는 대성당과 팔라초로 지금도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