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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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현실 논리라는 짐승(묵시 1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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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다. 사탄의 세력을 가리켰던 바다가 아니라 인간이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땅 위에서 두 번째 짐승이 올라온다. 어린양처럼 뿔이 있으되 두 개밖에 없고, 용처럼 말하되 용은 아닌, ‘~처럼’으로서 묘사되는 두 번째 짐승은 저 스스로의 모습이 빈약한, ‘허상’(虛像)의 존재다.

 

두 번째 짐승의 역할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첫째 짐승을 온 땅과 땅의 주민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다.(묵시 13,12 참조) 이 경배는 실은 속이는 일이기도 했다.(묵시 13,14 참조) 경배는 진실된 것이 아니라 속이는 것이어서 두 번째 짐승을 두고 ‘가짜 예언자’로 해석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초대 교회는 가짜 예언자로 몸살을 앓았다. 두 번째 짐승은 초대 교회의 가짜 예언자를 은유하는 표현들로 꾸며진다. 예컨대, 큰 표징과 불(묵시 13,13 참조). 큰 표징을 보여주는 일은 종말의 순간에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들이 행하는 것으로 서술된다.(마르 13,22; 2테살 2,9-10 참조) 기원후 3세기에 콥트어로 쓰인 엘리야 묵시록 3장에서도 거짓 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도 다루고 있다)가 등장하는데, 물 위를 걷거나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여러 이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짐승은 또한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도 한다.(묵시 13,13; 1열왕 18,38; 2열왕 1,10 참조) 예언자들의 대표 격인 엘리야를 흉내 내는 두 번째 짐승은 하느님을 알리고 선포하는 참된 예언자가 아니라 용‘처럼’ 말하는 ‘가짜 예언자’의 전형이다.

 

 

두 번째 짐승의 공간이 ‘땅’이란 이유로 역사 비평적 주석은 소아시아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에 주목한다.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소아시아는 황제와 여러 신들을 향한 숭배와 제사 등이 일상의 주축이었다. 현대인이 이해하는 단순한 종교적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의 세계가 이 세상에 구현되어 세상살이의 확실한 보증이 되길 바랐다. 거기에 황제 숭배와 여러 신들에 대한 경배는 사회 일반의 ‘당연함’으로 기능하였다. 사회 일반이 그러하다면 여러 신전의 건축과 그에 따른 예식과 제의 등의 참여와 실천은 현실의 상식 그 자체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고 짐승의 상을 세우라고 말하는 두 번째 짐승은 이러한 당시 사회 일반의 ‘당연함’을 더욱 당연하게 만드는 사회의식을 반영한다. ‘표징’과 ‘상’에 관련해서 주석 학자들은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과 대립하는 마술쟁이를 언급한다. 사도행전에도 바르예수라는 마술쟁이로 소개되기도 한다.(사도 13,6 참조) 마술쟁이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거짓 예언자의 또 다른 표상이어서 주석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의 두 번째 짐승을 인간 세상 안에 횡행하는 악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낸다. 


 

 

그러나 두 번째 짐승을 하느님과 대적하는 악의 은유, 혹은 하느님을 향하는 정통 신앙에 벗어난 이교나 이단 정도로 해석해 버리는 것은 너무 편협하거나 게으른 일이 아닐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복잡한 논리를 초월적 신에 대한 신앙 정도로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다. 

 

 

하여, 우리는 두 번째 짐승을 통해 이렇게 질문하고 해석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이른바 ‘현실 논리나 상식’을 근거로 신앙적 가치를 적당히 가미시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이다. 현실의 모든 표징과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는 일은 현실의 논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틈바구니 안에 하느님이 어떻게 소외되고 상처 입는지 밝혀내는 지난한 순교의 여정이기도 하겠다.

 

 

많은 경우 우리는 과학을 믿는다고 하지만 또 많은 경우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이유로 속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우려한다. 가톨릭 신앙을 가지면서도 세속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우려한다. 예를 들어, 성공과 행복이 거의 신앙화 되어 있는 오늘, 신앙 역시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만 기능한다는 사실. 고통과 슬픔, 혹은 불안과 우울에 대해선 신앙적 고민이나 사유가 배제된 채 패배의식이나 죄의식으로만 분리되어 처리된다는 사실. 

 

 

큰 표징 앞세운 거짓에 속아

 

 

짐승의 ‘표’ 받는 땅의 주민들

 

 

현실 논리나 상식에만 기대어 신앙 외면하는 우리와 닮아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고, 자기의 핏값을 치러 세상 모든 민족을 속량한 어린양이었다. 어린양의 핏속에 제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것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참된 성도이기도 했다. 번듯한 삶과 행복한 삶은 적어도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에겐 관심사가 아니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살아가는 시대, 로마의 권력과 상업적 성공 앞에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은 “나도 잘 살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로마의 현실 논리에 뒤섞이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실패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처럼 죽어가는 것을 힘겹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길 빌고 빌었다. 그렇게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은 현실 논리와는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곳에서 기어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다.

 

 

반면, ‘땅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 짐승의 표를 받는다.(묵시 13,16 참조)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표를 받는다. 그 표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한다.(묵시 13,17 참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현실 논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짐승은 그 현실 논리의 ‘어쩔 수 없음’을 너무나 강력하게 증거하고 책동한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지혜로워야 한다.(묵시 13,18 참조) 

 

 

요한 묵시록 17장 9절에 로마의 사치를 가리키는 대탕녀 바빌론이 등장할 때도 우리의 요한 묵시록은 지혜로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를테면, 666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 짐승은 666이다. 6이란 숫자가 악마적 요소를 지니고 그것이 세 번 반복한다고 해서 악의 본령으로 해석하는 고전적 경향이 아직 뚜렷하다. 그러나 666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악을 대변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사람’이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역사 비평적 관점은 그 사람을 로마의 황제들 혹은 로마 제국 자체로 해석하기도 한다.(묵시 17,11 참조) 

 

 

그만큼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에게 로마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역설적이게도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악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현실 논리’ 속에 우리의 666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현실이 그런데 어떡해?!’라는 우리의 자조(自嘲) 속에 666은 여전히 살아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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