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 모임에 참석한 정인화 원불교 교무(왼쪽부터), 이해인 수녀, 선엽 스님이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부산 수녀원에서 손잡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 모임에 참석한 종교인들이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부산 수녀원 성당에서 미사를 함께 봉헌하고 있다.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제공
‘광안리 하얀 수녀원’으로 불리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부산 금련산 언덕배기에 자리한 수녀원 정원에는 배롱나무의 진분홍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녀원에서 광안리 해변까지 직선거리로 600m 남짓. 바닷바람이 스치는 9월 첫날, 회색 승복의 비구니와 비구 스님,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차림의 원불교 교무들이 수도원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성당에는 손때 묻은 그레고리오 미사곡과 가톨릭 성가집, 성무일도서가 가지런히 꽂혀 있다. 흰 수도복을 입은 수녀 40여 명이 거리를 두고 침묵 속에 기도한다. 침묵과 명상에 익숙한 스님과 교무들도 두 손을 합장하고 수녀들의 저녁 기도에 마음을 보탰다. 수녀들이 일어서면 함께 일어서고, 앉으면 함께 앉았다. 이들에겐 세속과 물질 만능을 멀리하고, 기도와 수행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 가톨릭 수도원에서 불교·원불교 수행자들이 함께 수도생활을 체험하는 종교 간 대화 모임이 처음 열렸다.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위원회(위원장 박재찬 신부)는 1~2일 부산시 수영구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과 성분도 은혜의 집에서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 모임’을 개최했다. 모임에는 가톨릭 수도자뿐 아니라 불교 승려, 원불교 교무 등 32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성무일도와 미사 등 가톨릭 전례에 함께하고, 종교별 명상과 수행법을 체험하며 친교와 우정을 쌓았다.
불교 스님들과 가톨릭 수사가 명상을 하고 있다.
원불교 교무와 불교 스님들이 가톨릭 전례용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위원회
처음으로 불교·원불교 종교인 수도원에 초대
수도생활 소개하고 함께 기도
다른 듯 같은 듯
이해인 수녀 강의 통해 서로 나눔
미사 전례와 수행·명상 등 함께
MZ 세대와 시대적 변화 등 어려움 나눠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
“공동체 구성원들이 완전히 통합된 공동체가 있다. 끊임없이 내적 일치를 찾는 각각의 모든 수도승이 그 공동체를 이룬다. 내적 일치를 이룬 수도승들이 서로 통합되어 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수도승 생활이다.”(옥세르의 제프리)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수도승 신학’을 전공한 정혜영(에우카리아,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는 가톨릭 수도 생활을 소개하며, 12세기 시토회 수사의 말을 인용했다. 이어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성 베네딕토(480~547)를 소개하며, 사막의 의미와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오늘날 함께 사는 게 쉽지 않죠. 혼자서는 잘할 수 있는데 옆 사람 때문에 힘들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공동체는 내 최고의 영광이며, 내 최고의 십자가’라고.”
스님과 교무들 사이에서 공감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산 수도원에는 해인글방 주인 이해인(클라우디아) 수녀도 살고 있다. 법정 스님과 깊은 우정을 나눈 시인으로, 이날 ‘나의 삶, 시와 기도’를 주제로 강의를 맡았다.
“여러분은 시인학교 학생들입니다. 저도 타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데 1982년 서강대에서 종교학을 공부하며 타 종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습니다.”
‘나의 삶, 시와 기도’를 주제로 열린 시인학교에서 이해인 수녀는 마음에 드는 시를 낭송하게 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자연스럽게 자기소개 시간도 이어졌다.
“서울역 뒤에 있는 죽림동약현성당 앞에서 8년째 쪽방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 간 대화는 20년 했고요. 수도원에서 밥하는 부엌데기입니다.”(오수록 프란치스코 수사, 작은형제회)
“호스피스 활동을 6년 했습니다. 하루에 장례식장 서너 군데를 다니며 임종 환자들의 손을 잡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제 몸이 마비돼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꽃샘추위 속 아스팔트 위 민들레가 바람에 의연하게 흔들리는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아픈 이들을 위해 차를 연구하고 있습니다.”(선엽 스님, 남양주 마음정원 대표)
“노인요양시설에서 재가·방문 노인서비스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이끌어주신 어르신들의 노후를 동행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정인화 교무, 부산 화명 교당)
정인화 교무는 이해인 수녀의 시 ‘비가 전하는 말’을 낭송했다. “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 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 서로를 적셔주는 기쁨”이라는 시 구절에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인 수녀 강의를 촬영한 선엽 스님은 스님 130명이 있는 단톡방에 영상을 공유했다.
수도승 종교 간 대화 모임에 참석한 종교인들이 2일 모임을 마무리하며 나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종교란
이튿날인 2일, 수행자들은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총원장 조병윤(루갈다) 수녀를 만났다. 조 수녀는 수도원 입회 현황과 세대 차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사제와 수녀의 성별에 따른 역할에 대해 MZ 세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조 수녀는 “10년 전만 해도 한 해 10명 이상 들어왔지만, 최근 2~3명, 올해는 1명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인 입회자는 드물고, 베트남인 입회자가 6명이라고 설명했다.
현중(태고종 전국비구니회장) 스님이 “수도원의 교육과 규율이 너무 엄격한 것 아니냐”고 묻자, 조 수녀는 “세속화된 삶에 익숙한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매력 없을 수 있다”면서도 “세상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응답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외진 곳에 있는 관상·봉쇄수도원은 오히려 입회자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며 “4, 5세기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승처럼 우리가 열심히 살면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대 차이에 대해 조 수녀는 “봉사와 인내, 희생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조심스러운 시대”라며 “”젊은이들은 자신을 펼치고 구현하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해인 수녀도 “우리가 기쁘게 최선을 다해 이타적으로 살아, 사랑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명 9월 1일부터 이틀간 부산시 수영구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도원과 성 분도 은혜의 집에서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 모임’에 참가한 가톨릭 수도승들과 불교 승려 및 수행자, 원불교 교무, 구세군 사관 등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종교별 명상·수행법 소개
현중 스님은 “얼굴도 모르고 살아온 길도 다르지만, 마치 같은 종교인처럼 하나가 되는 시간이 됐다”며 “서로 알아가며 결국 함께 가는 길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공현(은덕문화원 원장) 원불교 교무는 “언어는 다르지만 종교인 공동체의 생명이 성경과 법문의 말씀 속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조화롭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수행자들은 가톨릭 미사를 봉헌하며 전례를 체험했고, 전례 용품과 수녀회 역사를 살펴봤다. 이튿날 가진 종교별 명상 및 수행법 소개 시간에는 안은주(베르나르도,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수녀가 ‘렉시오 디비나’를, 해광(춘천 더 마인드 명상 대표) 스님이 집중과 관찰을 통한 명상을, 선엽(남양주 마음정원 대표) 스님이 차 명상법을 소개했다.
원불교의 일기법을 소개한 김동주(중앙상주선원) 교무는 전시실에서 세상을 떠난 한 수녀의 묵상 노트 앞에 오래 머물렀다. 새벽 6시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30분마다 묵상을 적어 내려간 노트였다. 일기법은 어떤 상황을 접했을 때 스스로 깨닫는 생각과 느낌을 기재하는 원불교의 수행법이다.
20년 동안 종교 간 대화에 힘써온 오수록(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수사는 “지금 시대는 내 종교가 최고의 진리이고, 최고의 종교라고 해서 통하는 사회가 아니다”라면서 “종교 간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위원회 위원장 박재찬 신부
“가톨릭 수도승들(Monastics, 공동체 혹은 은둔처에서 수행 생활을 하는 수도자)과 이웃 종교 수행자들의 만남은 다른 종교 간 대화의 형태와는 다릅니다. 이웃 종교의 수행 생활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서로 다른 수행 방법과 수행 생활의 어려움을 나누고, 이를 통해 영적 친교와 영적 가족을 이루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최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 모임’을 국내에서 처음 개최한 박재찬(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신부는 “이웃 종교인들이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체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수도승 종교 간 대화위원회는 2019년 조성옥(에노스,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전 총원장) 수녀의 제안으로 박현동(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아빠스를 비롯한 남녀 수도승들이 모여 한국 베네딕도 장상 모임 산하 기구로 설립됐다. 위원회는 불교 사찰과 원불교 성지, 성공회 수녀원 등을 방문해 수행생활을 체험해왔다.
“처음 불교 사찰에 머물 때, 스님들이 ‘왜 오셨습니까?’라며 의아해했습니다. ‘스님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왔다, 스님들의 수행 방법을 배우러 왔다’고 하자, 스님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고 어느새 가까운 도반이 되었습니다. 종교는 달라도 수행자들만이 겪는 공통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 신부는 “종교 간 대화는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맺어지는 열매”며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과 일치할수록 열린 마음으로 경계 없는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대 영성가 토마스 머튼 신부(1915~1968)의 말을 인용하며, “종교 간 대화는 자신의 종교에서 충분히 수행한 사람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닮아, 경계 없는 보편적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는 “수도승 종교 간 대화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결실이 없는 듯한 아주 느린 작업이기도 하다”며 “성령의 인도 하에 이웃 종교인들과의 영적 교류를 통해 작은 인연의 씨앗들을 뿌려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웃 종교 수행자들과 교류
“수도생활 자체가 하느님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며 자신과 분투하는 긴 광야의 여정이듯, 종교 간 대화도 이웃 종교의 수행자들과의 영적 교류를 통해 다양하게 다가오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아차리는 긴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심리학과 영성 신학을 공부한 박 신부는 ‘토마스 머튼과 불교와의 대화’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와 국제 수도승 종교 간 대화위원회(DIMMID)에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