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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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유리알] 22년 만의 대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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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피천득 , 「인연」)


‘비가 내리는 8월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22년간 품어왔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언젠가 소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인연>이라는 수필을 비롯하여 서정적인 철학을 글에 담아 오신 금아 피천득 프란치스코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은 여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부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 산 양복과 구두는 뻣뻣했고, 당시에 인생의 불안과 걱정은 영혼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초인종을 누르자, 선생님은 ‘여기까지 방문해 주셨냐?’라며 반기셨다. 오래된 성경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전해지는 경건한 종이 향처럼, 두 손 모아 기도하시는 선생님의 주름진 손등을 나는 기억한다. 



인터뷰 당시 긴장한 탓에 어떤 질문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의 녹음은 공개되지 않고, 20여 년이 흐른 채로 나를 기다리고…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는 건, 고해성사 전 성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했던 질문들이 지금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까. 


“고민이 있습니다”로 시작된 질문들은 이랬다. “선생님. 사제로 살아야 하는데, 예술과 함께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또 “집필하실 때 어떻게 준비하시나요?”,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이 있으신가요?", “30여 년 전 절필을 하셨다는데, 아쉽고 힘들지는 않으신지?" 그리고 인생의 외로움까지. 사제품을 앞두고 쏟아낸 한 부제의 질문들이, ‘구순의 선생님을 지치게 하지는 않았을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고민이 있습니다. 금아 선생님. 사제로 살아가야 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글 쓰는 일도 그렇고요. 병행해도 될까요?” 이게 첫 질문이었다. 글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 순수하게 성직을 해 나갈 수 있을지 묻는 소년 같은 물음. 따뜻한 눈빛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그림만 그려요. 그림 그리는 걸로 성직자의 본분을 한다는 거지요. 아주 고운 색채를 쓰세요. 그분은 ‘그림 그리는 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림과 색채를 통해서 하느님을 섬긴다’고 그러세요. 또 어떤 분은 성당의 유리화 작업을 하세요. 그분도 성직자세요. 그러니 성직과 예술은 함께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것을 성직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성직으로 생각하시고요. 바흐, 헨델, 베토벤도 음악을 거룩한 성직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음악이 나올 수 없어요. 그건 아주 정확한 거예요.”


어쩌면 그때 선생님의 시를 읽고 갔더라면, ‘시를 쓰실 때 가슴이 뛰시는지’ 여쭤봤을 것이다. 그저 쉽게 대가의 글쓰기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였을까.


“아니요. 그건 무슨 방법이 없어요. 소위 ‘법칙이 없는 법칙’이지요. 글에는 이래야 한다는 게 없어요. 저는 많이 쓰는 타입이 아닙니다. 하루에 조금씩 썼어요. 그야 뭐 날마다 쓰지 않고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썼지요.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 같이, 무슨 법칙이라는 게 없는 거예요. 물론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소설가들은 밤새 집필을 합니다. 자기 습관으로 쓰는 거지요.”


나는 여기서 녹음파일 청취를 잠시 멈춰야 했다. ‘과연 대화를 통해 나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서품을 앞둔 젊은 그 시절 나에게 묻고 있었다. 대화 녹음은 들으면 그럴수록 켜켜이 쌓인 기억을 들춰낸다.


“여러 작가의 글을 보셨을 텐데요. 좋은 글의 기준이 있으신가요?” 순간 나는 질문들의 결이 같아지는 걸 느꼈다. 선생님은 답하시기 전에 ‘음~’하고 그윽한 소리를 자주 내셨다. “음~ 그건 금방 보면 알지요. 기준은 진실성입니다. 글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일부러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누가 그 어려운 글을 읽나요? 이상스럽게 써도 그래요. 진실되고 참되게 쓰는 게 중요합니다. 읽는 사람이 ‘이게 무슨 글인지 모르겠다’고 위화감을 느끼면 되겠어요? 또 우선 재밌어야 합니다. 바쁜 세상에 누가 재미없는 걸 읽어요? 그리고 내면이 따뜻하고 그래야지요. 마치도 사제가 제단에 올라가는 기쁨과 정성으로 미사를 봉헌하듯 그렇게 글을 대해야 합니다.”



대화가 무르익자, 딸의 이름을 가진 ‘난영이 인형’을 보여주셨다. “… 인형이 이제 육십이 넘었어요. 하하하! 육십이 넘었는데 제가 목욕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히고 그래요. 이건 잘 때 덮는 이불이고요. 저녁이면 눈을 감지요. 낮에는 다시 앉히고요. 또 이게 장난인데 옆에 있는 새끼 곰 인형에는 밤에 안대를 가려주고 아침에는 벗겨줍니다. 이렇게 누가 보면 장난하는 것처럼 살아요.”


오래된 녹음을 들을수록 나는 부끄러워졌다. 금아 선생님은 처음부터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며 하고 싶은 질문을 위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빙빙 말을 돌리고 있었다. 다시 뵙게 된다면, 바로 말씀드릴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을 아셨는지 이어지는 말씀에는 마음이 녹아 있었다.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참되게 존경해야 합니다. 자신을 존경하고 남에게 자기를 존경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물건이 뭐든지 버릴 수 있어도, 나 자신만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 이해하시나요? 나 자신만은 누구에게도 줘서는 안 되고. 무엇에 팔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시간은, 어느새 아득한 세월을 메우고 오늘을 사는 나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신부님, 어떠세요? 사제로 20여 년 살아보니 거기에 구하던 질문의 답이 있던가요?”


아니요, 선생님. 저는 아직도 질문들만 가득합니다. ‘왜 나이를 먹으면 그럴수록 지나간 이들이 그립고, 기억하면 더 아픈 건지.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세며 여전히 오늘을 살아야 하는 건지….’


이제야 입안에 맴돌던 질문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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