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행복을 꿈꾼다. 그렇지만 사랑의 시작이 반드시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는 사랑이 불행으로 돌변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 3년간 대한민국에서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범죄 신고와 검거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를 잡았다. 많은 여성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서로에게 호감으로 시작되었던 만남이 왜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사랑의 다양한 단계를 이해함으로써 그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사랑의 단계와 내포된 위험
사랑의 첫 단계는 상대를 온전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기준은 상대가 얼마나 능숙하게 자신의 욕구(특히 성적 욕망)를 충족시켜 주느냐에 달려 있다. 이처럼 상대를 단순한 도구로 여기고 피상적 만족을 추구하는 사랑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다음 단계는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드는 단계다. 사랑에 빠졌다는 감정, 상대에게 사로잡혔다는 느낌, 상대에게 의존하는 경향 등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외적 매력에만 의존하다 보니 상대방의 매력이 사라지거나 더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 역시 금세 식어버린다. 사람의 취향 또한 변하기 마련이라,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언제 식어버릴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내재한다.
마지막으로, 참된 사랑의 단계에 이르면 상대의 외적 조건을 넘어서 내면과 본질적인 면모, 즉 인격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바로 당신이기에 사랑한다”는 단계이며, 여기서부터 진정한 결합과 존중의 관계가 형성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의 원인으로 선, 인식, 유사함에 대해 설명한 이후에, 곧바로 이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사랑의 결과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참된 사랑의 결과: 합일, 내속, 무아지경
토마스는 “사랑의 결과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것 사이의 합일”(I-II,28,1)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는 구절로 사랑의 합일을 강조한다. 다만 토마스는 사랑하는 이들은 “둘 다 또는 둘 중 하나가 소멸될” 실체적 합일이 아니라 즉 공동생활, 대화, 상호작용 등 다양한 방식의 ‘감정적 합일(Unio Affectus)’을 추구한다고 본다.
사랑이 발전하면 ‘내속(Inhaesio)’의 경지에 이르는데, 이는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 속에 있고, 반대로 사랑받는 자도 사랑하는 자의 ‘삶의 중심’에 깊이 들어오는 단계다.(I-II,28,2) 우리의 정신과 기억 속에 사랑하는 대상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그 대상이 삶에서 사라질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과 황폐함을 겪는다.
더 나아가 ‘무아지경(Extasis)’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모든 정신이 상대에게 몰입되어, 완전히 자기 외의 존재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I-II,28,3) 사랑하는 친구의 슬픔이나 행복이 곧 나의 것이 되고, 우정의 사랑에서는 상대를 위한 선이 곧 자신의 선이 된다. 이처럼 사랑의 깊은 단계에서는 자기 존재와 타인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것이 심화되면, 상대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고통이 된다고 해도 곧 자기의 행복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왜곡과 불행의 원인
그러나 이런 깊은 합일과 자기초월이라는 결과만이 사랑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때로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사랑의 처음 두 단계에서 보이는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사랑은 치명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랑은 나눔이나 공유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폭압적이고 소유욕에 의해 움직인다. ‘질투’(Invidia)는 강렬한 사랑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인데, 사랑의 강도에 비례해 사랑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한다.(I-II,28,4) 이런 태도는 결국 폭력과 불행을 낳는다.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성의 상품화’, ‘성적 사랑에 대한 탐닉’, ‘관계의 도구화’ 등이 더해져 사랑이 오히려 혐오와 파괴, 자기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욕구, 자기를 희생한다는 이기주의적 열망 등이 문제를 심화시킨다. 스토커나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은 자신의 집착, 독점욕, 폭압적 감정마저 사랑으로 오해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상대의 인격과 고유성을 존중하지 못한다. 더욱이 부적합한 대상(마약, 음주, 도박 등)에 대한 집착은 내적 해체와 영적 붕괴, 심지어 신체적 파괴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토마스는 “사랑받는 대상이 위험한 만큼 사랑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사랑과 미움의 역동 - 정념의 변증법
토마스에 따르면, 미움은 사랑에 반대되고 사랑의 대상이 선이라면 미움의 대상은 악이다.(I-II,29,1) 미움은 나쁜 것, 해악이나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정념이다. 그러나 모든 미움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즉 사랑받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사라지거나, 그 선에 반하는 대상이 등장할 때 미움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I-II,29,2)
미움은 때로 사랑보다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사랑이 먼저다. 사랑의 결핍이나 변질이 미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에 대한 사랑을 잃으면 악에 대한 미움만 남는다. 심지어 미움이 성장하면 악에 대한 집착이나 왜곡된 쾌감으로 굳어진다. 자기증오, 진리에 대한 증오, 도덕적 혼란과 자아상실 등도 사랑의 결핍 또는 왜곡에서 설명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은 단순한 욕구, 소유, 집착을 넘어 상대방의 인격과 자율성, 독립성, 성장에 대한 존중과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타인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거나, 대화와 나눔 없는 결합은 오히려 지배와 종속만 남긴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존경과 책임의 균형, 나와 상대 모두의 성장, 인격적·상호적 나눔이 실현되는 사랑이어야만, 우리는 불행과 파괴를 막고 인간적 성취와 만족, 성숙을 얻을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