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 앞마당에 설치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아주는 베로니카 성녀상. 좌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거룩한 곳에서 출발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 형제들에게 전한 선교사들에게” 이 성상은 오귀스트 카를리가 제작한 것으로, 마르세유대교구 주교좌 성당 안에 있는 1900년 작품의 복제품이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 앞마당에 설치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아주는 베로니카 성녀상. 좌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거룩한 곳에서 출발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 형제들에게 전한 선교사들에게”. 이 성상은 오귀스트 카를리가 제작한 것으로, 마르세유대교구 주교좌 성당 안에 있는 1900년 작품의 복제품이다.
마르세유서 떠나기 전 마지막 미사 드린 곳
2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마르세유. 지중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언덕 위엔 ‘바다의 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웅장한 성당이 서 있다. 그 이름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Notre-Dame de la Garde)’, 우리말로 옮기자면 ‘수호자이신 성모’ 대성전(1879년 준대성전으로 승격)이다. 원래 ‘보초’를 뜻하는 라 가르드는 10세기경 이 언덕에 붙은 이름이다. 바다를 감시하는 망루가 있어서였다.
이곳은 다름 아닌 타지를 향해 출항을 앞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황 파견 선교사제들이 고국에서 마지막 미사를 거행한 장소였다. 그래서 2021년 10월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뱅상 세네샬 신부는 감사 차원에서 성전 내부 벽에 이런 글을 새겼다.
“마르세유에서 출항한 선교사 1200명은 모국을 향한 마지막 시선과 전구를 수호자이신 성모께 바쳤습니다. 그들의 선교 사명과 성모님의 끊임없는 보호와 전구에 감사드립니다.”
이 1200명은 1860년부터 1960년까지 100년간 집계한 숫자다. 칼레 신부는 바로 그 첫해인 1860년 7월 27일 동료 조선 선교사 리델 신부와 함께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9년 뒤 홀로 프랑스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칼레 신부와 박상근(마티아) 복자 후손들도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을 찾았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 안쪽 제대의 은으로 제작한 성모자상. 1837년 봉헌된 성상으로, 칼레 신부도 이 앞에서 항해를 앞두고 바다의 별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청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 전 이집트 거쳐 아시아로
1860년 7월 28일 칼레 신부는 마침내 동료들과 마르세유 항구에서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수에즈 운하가 뚫리기 전(1869년 개통)이지만, 이집트를 거쳐 아시아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기 우편 항로 덕분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내려 기차로 카이로를 거쳐 수에즈로 이동한 뒤, 다시 증기선을 타고 홍해를 거쳐 인도양을 횡단하는 노선이었다.
그전까지 선교사들은 주로 대서양으로 통하는 보르도나 르아브르에서 머나먼 아시아로 향했다.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적도를 넘어 희망봉을 우회한 뒤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였다. 최소 6개월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불과 2년 전인 1858년 출발한 조선 선교사 랑드르·조안노 신부조차 이렇게 움직였다.
이에 비해 우편 항로는 가격이 비싼 대신 시간은 훨씬 단축됐다. 마르세유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총대표부가 있는 홍콩까지 40일밖에 안 걸렸다. 주요 경유지는 △아덴(예멘) △갈(스리랑카) △페낭(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상해 등 대부분 영국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영국 해운사 P&O(Peninsular and Oriental Steam Navigation Company)가 1840년대부터 노선을 독점했다. 칼레 신부도 항해 내내 이 회사 소속 여객선을 타야 했다. 4년 뒤 같은 경로로 출발한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동료 3명부턴 프랑스 해운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칼레·리델 신부는 1860년 8월 28일경 페낭 신학교에서 조선인을 처음 만났다. 최양업 신부에게 선발돼 1855년 입학한 제1기 유학생 김 요한과 임 빈첸시오였다. 이들은 조국으로 가는 새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상해에서는 병으로 학교를 떠나 요양 중이던 마지막 신학생 이만돌(바울리노)이 귀국하기 위해 합류했다.
마르세유의 상징인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 선교지로 떠나기 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고국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드린 곳이다. 황금으로 도금한 11.2m 높이 성모자상이 재도금 작업 중이다.
마르세유의 상징인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 선교지로 떠나기 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고국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드린 곳이다. 황금으로 도금한 11.2m 높이 성모자상이 재도금 작업 중이다.
‘메린도’라는 무인도서 조선 배로 갈아타
칼레 신부 일행은 끝으로 유럽인들이 ‘체푸’라고 부르던 산동반도 항구도시 지부(芝 , 오늘날 연태)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선 입국에 연거푸 실패해 대기 중이던 랑드르·조안노 신부를 만나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1861년 3월 19일 마침내 선교사들은 중국 어선을 빌려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틀 뒤 칼레 신부 일행은 베르뇌 주교가 보낸 조선 신자들과 만나기로 한 백령도 근처 바위 섬에 도착했다.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메린도(Merinto)’나 ‘모린도(Morinto)’라 불리는 무인도로, 30분이면 섬 전체를 다 둘러볼 정도로 작았다.
1866년 관변 사료 「우포청등록」에도 볼리외 신부가 “백령도 근처 모인도(毛仁島)에 상륙했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다른 국내 사료에는 비슷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연구자들은 크기나 위치로 보아 황해도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 대동만에 있는 ‘월내도(月乃島)’로 추정한다. 조선 후기 중국 어선이 자주 출몰한 곳으로, 1852년 철종이 청 황제(함풍제)에게 단속을 호소하며 언급하기도 했다. 지금은 백령도 타격을 맡은 북한 월내도 방어대가 주둔한다.
달레 신부가 1874년 펴낸 「한국천주교회사」 상권에 수록된 조선 지도를 보면, 월내도 위치에 ‘메린도’라고 적혀 있다. 1880년 메린도를 거쳐 입국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대주교의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30년 메린도 위치를 묻는 일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의 편지에 “북쪽으로 육지와 남쪽에 백령도가 모두 보인다”며 “지도를 보니 메린도 위치에 월내도가 자리한다. 그 섬이 메린도일 것”이라고 답장했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에 선원들이 봉헌한 그림들. 19세기 칼레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탄 증기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교황 파견 선교사 4명, 드디어 한양 도착
3월 28일 밤, 칼레 신부 일행은 메린도(월내도) 인근에서 조선 배로 갈아탔다. 또 한복으로 바꿔 입었다. 랑드르 신부는 “서울 출신의 교우가 선장”이라며 “기해박해 순교자 김효임(골룸바)·효주(아녜스)의 오빠(김 안토니오)”라고 편지에 적었다.
배는 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선교사들은 들키지 않으려 거적을 덮은 채 묵주기도를 바치며 버텼다. 이들은 서해 입국로를 개척한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체포됐던 등산진(순위도)도 지났다. 한강 어귀에 다다라선 조각배로 갈아탔다. 5시간 뒤 한양에서 약 12㎞ 떨어진 곳에 내려 짚신을 신고 걸었다. 이어 한양도성 근처 전교회장 집에 들러 국과 막걸리로 허기를 달래고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서대문(돈의문)을 통과해 구불구불한 길을 몇 개 지나니 마침내 주교관으로 쓰이는 집에 도착했다. 4월 7일 새벽 5시경이었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과로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두 주교가 선교사 4명을 환대했다.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부대목구장 다블뤼 주교였다. 다블뤼 주교 주례로 감사 미사가 봉헌됐다. 칼레 신부가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지 8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한국으로 첫 ‘커피’ 배달(?)한 칼레 신부
선교사들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 대표 리브와 신부가 보낸 짐꾸러미 60개도 무사히 주교관에 도착했다. 그 안에는 베르뇌 주교가 1860년 3월 6일 자 편지로 주문한 커피 40리브르(20㎏)도 들어 있었다. 이를 두고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서 최초로 커피를 마신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커피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레 신부 일행 역시 1861년 한국 최초로 커피를 들여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후로도 베르뇌 주교는 홍콩에 몇 차례 더 커피를 주문한다. 아마 다른 선교사나 신자들과도 나눠 마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