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산치오, 발다사레 페루치, 그리고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각기 우르비노, 시에나, 피렌체 출신이지만 로마에 와서 브라만테가 세운 교황청의 건축 공방에서 건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브라만테와 함께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을 이끌었고, 매너리즘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즈음인 1514년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에 로마에서 태어나고 자란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라는 소년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무 살 정도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작 열다섯 살이었고 바로 라파엘로의 제자가 되어 회화와 건축을 배웠습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페루치나 안토니오와 다르게 회화적 소질을 보였고, 그래서 라파엘로의 조수로 바티칸의 프레스코화 작업에 일찍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그는 라파엘로의 주요 회화 작품들을 물려받아서 마무리 작업을 거의 도맡았습니다.
특히 교황의 아파트에 있는 라파엘로의 방 연작 가운데 ‘보르고의 불의 방’에 있는 프레스코화에 줄리오 로마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콘스탄티누스의 방’에 그려진 <십자가의 환시>와 <밀비오 다리의 전투>도 그가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1524년 만토바의 페데리코 2세 곤차가 공작의 초대로 만토바로 이주하면서 줄리오 로마노의 화가로서의 인생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공작은 줄리오 로마노를 궁정 예술가로 임명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직자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사실 줄리오 로마노가 당시 로마의 건축 공방 출신 중에서 실력 있는 사람이면 모두 거쳤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가 바티칸의 ‘라파엘로의 방’에 계획된 프레스코화를 모두 마치고 나서 만토바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만토바에서 공작의 마음을 만족시킨 것은 줄리오 로마노의 회화 실력이 아니라 건축가로서의 역량이었습니다. 그의 건축은 스승인 라파엘로처럼 회화를 바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줄리오 로마노의 건축은 구조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이 분리되었고, 그중에서 그가 관심이 있는 부분이 장식이었기 때문에, 그의 매너리즘도 장식 분야에서 나타났습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만토바에 도착한 다음 해부터, 페데리코 공작의 요청으로 ‘팔라초 테(Palazzo Te)’와 ‘카사 디 줄리오 로마노(Casa di Giulio Romano)’를, 그리고 페데리코의 사후 에르콜레 곤차가 추기경의 요청으로 ‘산 베네데토 인 폴리로네 수도원(Abbazia di San Benedetto in Polirone)’과 ‘만토바 대성당(Duomo di Mantova)’의 개축 등을 맡으며, 15세기에 알베르티가 만토바에 진출하여 르네상스 건축을 전파한 이후, 16세기의 만토바 건축을 주도하며 발전시켰습니다.
팔라초 테의 평면을 보면 전형적인 로마식 빌라의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은 정사각형의 안뜰 둘레로 방들이 배치되어 있고, 정면의 출입구와 반대쪽에 정원으로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정원은 부속실 몇 개를 제외하면 벽으로 둘러친 넓은 개방된 공간이고 건물 반대쪽에 엑세드라(Exedra, 반원형 광장)가 있습니다.
안뜰의 네 면을 둘러 있는 방들은 고전적인 규칙성을 보이지만 ‘거인족의 방’의 벽화는 반고전성의 불규칙한 형태를 보입니다. 입면에서도 이러한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는데, 전반적으로 고전적인 요소들을 사용하면서 페데리코 공작의 정치적 위상을 부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고전적인 요소의 사용에 있어서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을 강조하여 여러 유형이 혼재했고 부재도 변형되었습니다.
건물의 정면은 중앙의 출입구와 양측의 베이가 삼분법으로 대칭 구획되었고, 중앙 출입구는 다시 세 개의 아치문으로 반복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치의 키스톤과 창틀에는 거친 표면 처리를 하였고, 창과 프리즈 사이에 중간층을 넣어서 수직 분할이 비율에 맞지 않았습니다. 또한 양측의 베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이에 간격이 좁은 베이가 하나 추가되어 있습니다. 다른 베이보다 좁지만 그렇다고 쌍기둥도 아닌 형태입니다.
이런 형태는 정면이 전체적으로 갖고 있는 삼분법과 대칭과 반복에 의한 고전성을 무너트립니다. 또한 프리즈에 새겨진 조각을 보더라도 성경이나 역사 등에 관한 성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소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뜰에서 보이는 면은 토스카나식 오더와 신전 파사드(페디먼트)를 사용하여 고전적인 형태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앙의 출입구를 보면 아치문 위에 페디먼트를 장식의 형태로 처리하여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가 갖는 위계질서와 구조적 안정을 무시하였습니다. 아치문과 페디먼트의 결합은 양측의 베이에서 더욱 반고전성을 드러내는데, 페디먼트는 작아지고 경사면의 두 변만으로 구성하고 그 속을 아치의 키스톤이 차지하였습니다.
양측의 베이도 넓은 베이와 좁은 베이가 교대로 배치되었는데, 좁은 베이는 건물 정면에서와 같이 쌍기둥으로도 볼 수 없는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팔라초 테는 줄리오 로마노의 고전성과 반고전성의 양면을 모두 담고 있는 불균형의 형태를 취하면서 매너리즘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줄리오 로마노는 산 베네데토 인 폴리로네 수도원과 만토바 대성당의 개축 공사를 맡았습니다. 만토바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는데 14세기 말에 파사드 등 일부가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습니다. 하지만 1545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에르콜레 곤차가 추기경은 줄리오 로마노에게 재건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는 대성당을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였는데, 이 건물이 팔라초와는 다르게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에, 반고전적 불균형보다는 고전주의적 안정성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파사드를 비롯한 외부는 이전의 형태를 존치하였고, 성가대석과 네이브를 중심으로 내부 공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모델은 그가 로마를 떠나기 전에 봤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가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 살면서 옛 대성당에서 느꼈던 신앙의 향수(鄕愁)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