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30-3번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던 백사마을이 재개발에 들어간다. 1960년대 후반, 도심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모여들며 형성된 이 마을은 반세기 동안 가난과 연대,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어 왔다. 이제 마을은 사라지지만, 그 속에서 살아온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수십 년 동안 마을과 함께한 서울대교구 중계양업본당(주임 전호엽 프란치스코 신부)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골목과 집들,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이 또렷하다. 본당과 마을이 함께한 시간은 지금도 선명하게 이어지고 있다.
9월 4일 백사마을에서는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마을 내부는 이미 출입이 통제된 상태. 주민 대부분은 이미 떠난 뒤였다. 요란한 굴착기 소리만이 한때 사람들의 삶으로 가득했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마을 주변에는 이곳이 누군가의 집이었음을 알리는 몇몇 흔적들 그리고 재개발 확정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30대부터 70대 때까지 살던 고향 같은 곳인데 이렇게 사라지는 걸 보니 시원섭섭해요.”
45년간 마을에 살았다는 전정순(엘리사벳) 씨는 허물어진 옛집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아쉬움과 후련함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3년 전 인근 빌라로 이사했지만, 마을에서 중계양업본당과 함께한 순간들은 여전히 생생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도움을 준 건 늘 본당 공동체였어요. 매주 도시락을 챙겨주고, 집도 고쳐주고, 신부님과 함께 고기도 구워 먹고요. 그 시절도, 함께했던 이웃들도 다 그립습니다.”
함께한 시간에 스민 마을의 온기
전 씨의 말처럼 본당은 1998년 상계2동본당에서 분가한 뒤 줄곧 백사마을과 동행해 왔다. 도시락 배달, 집수리, 환자 돌봄, 방문 대화, 장학금·생활비 지원, 목욕·연탄 봉사까지. 오랜 기간 곁에 머문 만큼 신자들의 추억도 각양각색이었다.
본당 설립 당시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였던 손은숙(베로니카) 씨는 성탄 밤을 잊지 못한다.
“아이들과 캐럴을 부르며 마을을 돌면, 어르신들이 어묵이나 호빵을 내주셨어요. 돌아갈 때는 ‘아이들 간식 사주라’며 손에 적은 돈이라도 꼭 쥐여 주시곤 했죠. 하얀 눈 내리던 겨울 밤, 집마다 백열등이 켜진 마을의 모습은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아름다웠어요."
춥고 가난했지만, 마을에는 온정이 가득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장을 지낸 양시모(시몬) 씨는 “도시락 봉사를 가면 주민들이 빈 그릇에 채소나 고구마를 담아주거나 천 원 이천 원이라도 꼭 챙겨주셨다”며 “연말 불우이웃돕기 ‘사랑의 찻집’을 열면 도시락을 받던 분들이 와서 모금함에 돈을 넣고 가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각별했던 만큼 헤어짐의 아쉬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본당 프란치스코회 회장이었던 문정란(데레사) 씨는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봉사를 중단할 때 ‘도시락보다는 매주 이렇게 얼굴 보는 것을 기다렸는데, 이제 못 본다니 아쉽다’고 끌어안고 우신 분도 계셨다”며 “빈집을 볼 때마다 어르신들이 잘 지내시는지, 몸은 건강하신지 안부를 묻고 싶다”고 전했다.
성당 한편에는 마을과의 기억을 나눌 수 있는 게시판이 마련돼 있었다. 이곳에서 신자들은 마을과 함께했던 기억을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놓았다.
마을은 누군가에게 ‘그립고 정겨운’ 이웃이었으며, 다른 누군가에게 ‘모두가 하나가 됐던’ 공간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두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기억한다는 것
마을을 기억하는 본당 공동체의 추억 그대로, 개개인의 기억은 공동체와 함께할 때 특별한 의미를 낳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기억은 사회적 집단 속에서 만들어지고 공유되며, 이 과정에서 기억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본당이 백사마을을 기억하는 것은, 이곳을 단순한 재개발 지역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오갔던 공동체의 터전’으로 남기는 일이다.
교회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 19)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며 그 신비를 다시 살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을에서 성장한 중계양업본당 출신의 한 신부는 “교회는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기념하는 공동체”라며 “가난한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사랑하던 마을 주민들과 어려운 이웃을 도우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새로 조성되는 마을에서도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본당은 마을과의 과거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올해 하반기 시작되는 재개발 공사는 2029년 상반기 마무리될 예정이다. 3178가구 규모의 자연 친화형 공동주택 단지가 들어서며,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이 섞인 ‘소셜믹스’ 형태로 조성된다. 본당은 300세대 이상의 신자 유입을 예상하고 있다.
전호엽 신부는 “다양한 배경의 신자들이 신앙 안에서 위화감 없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9월 21일 예정된 전 신자 성지순례를 시작으로, 단체별·구역별 모임과 피정 등을 활성화하며 새로운 교우들을 맞이할 준비에 일찌감치 나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향후 3년 안에 교리실과 화장실 등 필요한 공간을 확충하고, 다시 돌아오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지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사마을은 곧 지형도에서 사라지겠지만, 교회와 신자들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기억은 곧 공동체를 이어가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