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13장의 두 마리 짐승은 단순히 영성적이거나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현실이었고 그 현실의 무게는 꽤나 무겁고 저항하기 두려운 힘이었다. 그래서 ‘땅의 주민들’은 그 현실에 순응하고 말았다.
요한 묵시록 14장은 ‘땅의 주민들’과 다른 ‘십사만 사천’을 언급한다. 요한 묵시록 7장에서 구원을 노래했던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었고 그 백성의 자리는 십사만 사천이 지니는 수적 가치, 그러니까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무한대의 자리였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은 십사만 사천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다.(묵시 7,9 참조) 십사만 사천이 두 짐승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현실의 무게 한가운데, 하느님의 백성이 자리 잡고 있다.
십사만 사천은 또한 어린양과 함께 있다. 요한 묵시록 5장 6절에 살해되었으나 서 있던 어린양은 이제 ‘서 있는’ 모습 하나로 소개된다. ‘서 있음’이 부활과 생명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서 있는 어린양은 하느님 백성의 자리가 생명이 가득한 자리라는 사실 또한 은유한다. 더욱이 어린양이 서 있는 공간은 ‘시온산’이다. 시온산은 전통적으로 종말의 순간에 구원이 완성된 공간으로 이해된다.(요엘 3,5 참조) 기다리거나 주저해야 할 시간과 공간은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여기가 구원이요, 마지막이어서 어린양의 생명과 그 생명을 누리는 십사만 사천은 하나로 영원하다.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짐승의 표가 아니라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다. 성서신학자 로버트 헨리 찰스(R. H. Charles)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받은 십사만 사천을 순교자로 이해한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 7장에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셀 수 없는 무리가 환난 속에서 구원을 외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살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의 환난 속에서도 꿋꿋이 제 신앙을 지켜내고 살아 낸 이들이 십사만 사천이었다.
요컨대 요한 묵시록 14장에 나타나는 십사만 사천과 어린양이 머무는 자리 시온은 환난 속에서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믿는 이들이 하나 되는 현실의 삶 자체다. 본디 그리스도인이든 땅의 주민들이든 삶을 지탱하는 자리는 현실 논리가 맹렬한 이 땅 위에서다. 서로의 체험과 지향이 다를 뿐,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누구는 현실 논리를 따라 살지만, 누구는 하느님의 뜻을 골똘히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만들어낸다. 두 짐승이 자리한 가운데, 믿는 이들은 어린양과 더불어 시온산을 기어이 만들어낸다.
하늘에서 큰 물소리 같기도,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목소리는 십사만 사천만이 배울 수 있는 새 노래다. 그 노래는 천상의 전례에 참여한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울려 퍼진다. 우리는 이미 요한 묵시록 5장에서 ‘새 노래’를 맞닥뜨렸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어린양의 속량 행위를 노래했고, 어린양을 통한 구원을 확증했다.
요한 묵시록 14장의 새 노래가 가리키는 것 역시 어린양의 구원 업적에 대한 칭송이라 학자들은 추정한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어린양의 피로 속량 된 세상의 모든 민족과 땅으로부터 속량 된 십사만 사천은 새 노래를 중심으로 하나다. 이를테면, 새 노래는 통합의 노래다. 지난 노래와 구분되어 배타적인 노래가 아니라 우주를 품듯,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구원의 자리로 이끄는 통합의 노래다. 그리하여 보편적 숫자인 십사만 사천만이 배울 수 있다. 보편은 보편이 담을 수 있다.
4절부터 십사만 사천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히지 않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이라 규정한다. 다분히 성(性)적 절제주의나 금욕주의를 떠올리는 말마디인데,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록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낯선 표현이다. 현대에 와서 이 대목은 안티페미니즘(반여성주의)으로 해석되어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히려 쿰란 공동체의 절제주의에 부합하는 ‘동정’이란 말마디를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예수님을 따르고 구원에 합당한 이들은 금욕이나 절제를 생활화해야 한다는 뜻일까.
십사만 사천은 곧 하느님 백성
이마에 성부와 성자 이름 받고
세상 환난에서도 ‘어린양’ 따라 꿋꿋이 신앙 지켜낸 순교자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과 구원의 문제를 연관시켜 해석하는 일은 요한 묵시록을 읽는 데 합리적이지 않다. 요한 묵시록은 남녀의 관계나 성적 문제 등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묵시 6,15 참조) 다만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스스로 동정을 지켜 거룩해지는 이들에 대한 칭송을 엿볼 수 있다.(마태 19,12; 1코린 7,1.8.26 참조)
이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비난이나 폄훼가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열정에 방점이 찍혀 해석되어야 한다. 요컨대 다른 것으로 참된 신앙이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것. 4절의 ‘더럽히다’라는 동사 ‘몰뤼노(μολ?νω)’는 ‘얼룩이 지다’라는 뜻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축제와 제사에 참여하여 그 고기와 음식을 먹는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8,7 참조)
요한 묵시록은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니콜라오스파에 물들지 않는 성도들을 ‘자기 겉옷을 더럽히지 않는’ 이로 소개한다.(묵시 3,4 참조) 17장에 가서 타락한 로마 제국의 사치를 언급하면서 ‘대탕녀’라는 여인을 등장시키는데, 이것 역시 여성에 대한 폄훼가 아니라 하느님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불신앙의 은유로 사용했다.
에우세비우스가 쓴 「교회의 역사」는 베티우스 에파가투스가 순교하기 전 남긴 말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어린양이 가는 어느 곳이든 따라간다.”(「교회의 역사」 5,1.10) 십사만 사천은 어린양이 가는 길, 곧 순교의 길을 걷는 이들이다. 순교의 길은 거짓이 없고 거짓 우상에 물들지 않는다.(이사 44,20; 57,4; 예레 3,23; 13,25 참조)
십사만 사천의 동정은 현실 한가운데 하느님의 자리와 그분의 뜻을 결코 잊지 않는 우리 신앙인의 결기와 다르지 않다. 두 짐승이 설쳐대는 현실 안에 신앙은 참으로 힘든 것이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것임은 틀림없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